- 입력 2024.11.25 09:00
곽진선 국가과학기술인력개발원 연구위원(전 국민통합위원회 과학기술과의 동행 특위위원)

기술패권 시대를 맞아 국제사회의 기술 경쟁이 치열하다. 첨단 기술을 보유한 국가는 국제관계에서 우위를 확보하고, 이는 국가의 성패를 가른다. 역사적으로 강대국이 된 국가는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혁신 국가였다. 새로운 기술을 기반으로 철도·전기·철강·자동차 등 선도산업을 주도한 국가는 큰 번영을 맞이했다. 혁신성이 높은 국가는 신생 기술의 채택과 확산을 장려하였으며, 비약적인 생산성 향상을 통해 경제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다.
올해 노벨 경제학상은 국가 발전에 정책과 제도가 어떻게 영향을 끼쳤는가를 연구한 대런 애스모글루, 사이먼 존슨, 제임슨 로빈슨 교수가 공동 수상했다. 이들은 포용적 제도가 창조적 파괴를 통해 기술 혁신을 가능하게 하며 산업 성장과 경제 발전을 촉진한다고 했다. 특히 대런 애스모글루와 제임스 로빈슨이 공동 집필한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는 국가 발전을 지정학적으로 논한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저서 '총, 균, 쇠'의 일부 내용을 반박하며, 국가의 번영을 결정하는 것이 다름 아닌 정책과 제도임을 강조하고 있다. '지정학(geo-politics)'에서 '기정학(techno-politics)'으로 재편되는 국제질서 속에서 과학기술 정책과 시스템은 새로운 권력 지형의 중요한 열쇠다.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발전은 그동안 정부 정책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국가가 주도한 연구개발(R&D) 투자는 우수인재 유입과 산업기술 개발을 이끌며 눈부신 성장을 거듭했다. 한국의 추격형 R&D 전략은 세계가 주목한 국가 발전 모델이기도 하다. 이토록 짧은 시간에 세계 우위의 기술 분야를 확보하고 주력 산업을 키워낸 것은 드문 성공 사례이기 때문이다.
추격형 R&D 전략을 통해 과학기술 기반을 다진 우리나라는 또 한 번의 도약이 필요한 시기다. 현재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많은 영역이 이미 국제적인 수준에 도달했고, 일부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이제는 선진국의 과학기술을 추격하는 것이 아니라 주도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기술이 국가의 명운을 좌우하는 현재 강대국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선도형 R&D로 체질 개선이 필요하다. 특히 국가 차원의 과학기술 경쟁력을 향상하고 지속하기 위해 연구개발 시스템 혁신과 과학기술인재 양성이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우리나라의 인구절벽, 이공계 기피 현상은 다음 세대의 과학기술계를 염려하게 한다. 우수인재를 세계적인 연구자로 양성하려면 연구자가 연구적 몰입과 성취를 누리며 마음껏 연구할 수 있는 여건이 보장되어야 한다. R&D에서 중요한 것은 규칙을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하고 실패를 해도 또 다른 방식으로 도전해 볼 수 있는 자율성이다. 이공계의 학문적 속성 탓 실패한 R&D 자체도 연구적 가치를 지닌 경우가 많다. 그러나 현재의 연구개발 시스템은 실패를 허용하지 않는다. 새로운 세대의 젊은 연구자를 유입시키고 창의적인 환경에서 도전적인 연구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이전보다 자율성이 강조되어야 한다.
더구나 R&D 조직은 대표적인 '애드호크라시(adhocracy)' 조직이다. 애드호크라시 조직은 급속히 변화하는 기술과 사회에 대응하기 위해 전문가로 구성된 혁신적 조직을 의미한다. 이들은 연구 프로젝트와 같은 공통된 목표 달성을 위해 자유로운 사고와 다양한 문제해결 기법을 중요시하는 집단이다. 즉 이공계 학문과 R&D 조직의 특성상 연구자의 자율성을 존중하는 연구개발 시스템이 뒷받침되어야 적극적인 연구개발 활동을 펼칠 수 있다.
막스플랑크연구소는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는 운영 철학으로 무려 39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했다. 자율성 높은 운영방식은 연구자 사회에서 오히려 건강한 경쟁 관계를 형성하고 결과적으로 양질의 연구 성과를 창출했다. 연구자에게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되 연구를 수행하는 동안 관리 요소와 행정 절차는 최소화한 것이다. 단, 엄격한 동료 평가를 실시해 철저하게 성과를 관리한 덕분에 세계적인 연구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과학기술 경쟁은 곧 우수인재 확보와도 직결된다. 과학기술인의 체계적 양성을 위해서는 산·학·연 연계는 물론 기술·교육·노동·산업 영역까지 전반적으로 조망해야 한다. 또한 융복합 현상이 심화되고 학문의 경계마저 모호해지고 있어 전공 기준의 후속 세대 양성만으로는 변화하는 일자리 지형을 모두 반영하기 어렵다. 더구나 인재의 발굴·육성·배치는 단기간에 성과를 기대하기 어려운 만큼, 장기 계획 수립과 지속적 이행을 총괄할 기구가 필요하다.
경쟁력 있는 정책 수립을 위해서는 과학적인 의사결정을 뒷받침할 데이터와 의사결정체계가 필수적이다. 장기적인 안목으로 계획을 세워 미래에 대비하면서도 이슈 사항에 대해서는 신속하고 세밀한 조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인력 정책 또한 변화에 민첩하게 반응하면서 신속한 판단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현재 수집되고 있는 인력 데이터는 목적·범위·대상이 달라 정책 결정에 활용하는데 한계가 있다. 따라서 경제·사회·기술·인력 등 광범위한 환경분석과 긴 호흡의 인력 정책을 실행하기 위해 종합 조정 기능을 가진 컨트롤 타워가 구심점이 되어야 한다. 과학기술인력 컨트롤 타워는 과학적인 데이터를 기반으로 첨단산업인력 양성, 산·학·연 협력, 글로벌 네트워킹 지원 등 시의성 높은 인력 문제를 해결하고 전 생애주기 관점의 인재를 육성함으로써 국가 차원의 인력 양성 생태계를 조성할 것이다.
글로벌 시대에 기술 강대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과학기술 혁신과 창의적 인재가 가장 시급한 사안이다. 국민통합위원회의 ‘과학기술과의 동행 특별위원회’에서도 젊은 과학자를 위한 사안을 중점적으로 논의하고, 이들을 위한 연구·경력·생활 지원방안을 제시한 바 있다. 패러다임 전환 시기를 맞아 첨단기술 개발과 이를 가능하게 할 과학기술인력의 육성은 완성도 높은 과학기술 정책을 통해 실현될 것이다.
혁신적인 과학기술 정책으로 과학기술인이 자부심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연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더 많은 미래 인재가 과학기술계를 찾을 수 있도록 연구 현장에 활기를 불어넣어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