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전다윗 기자
  • 입력 2023.02.13 06:00

흔들리는 '초격차'…이재용 선택은 '정공법'
"위기 때 진짜 실력 나와"…올해도 과감한 투자

전문가들이 전망하는 올해 우리나라 경제 상황은 살얼음판 그 자체다.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도 수출 기록을 경신하며 성장 가도를 달려왔던 한국은 불과 1년여 만에 사면초가에 놓였다. 올해 경제 성장률 전망치는 불과 1%대 수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전망한 세계 각국의 평균 성장률에도 한참 못 미친다. 고물가·고금리·고환율이라는 삼중파고가 몰아치는 가운데, 각종 대내외 악재가 겹쳐 기업들의 숨통을 죄는 형국이다. 주요 그룹을 이끄는 수장들의 어깨도 자연히 무거워졌다. 얼어붙은 경영 환경에서 '도태'와 '도약'은 한 끗 차이다. 앞에 놓인 산적한 과제들을 어떻게 타개하느냐에 따라 그룹의 운명이 갈린다. 위기를 기회로 삼아 '래빗 점프'하려는 오너들의 과제와 전략을 살펴본다. 

이재용(가운데)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 7일 삼성디스플레이 아산캠퍼스를 찾아 QD-OLED 생산라인을 둘러보고 사업전략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제공=삼성전자)
이재용(가운데)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 7일 삼성디스플레이 아산캠퍼스를 찾아 QD-OLED 생산라인을 둘러보고 사업전략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제공=삼성전자)

[뉴스웍스=전다윗 기자] 별도의 취임식도, 메시지도 없었다. 지난해 10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의 승진은 조용히 이뤄졌다. 10년 절치부심 끝에 부회장 꼬리표를 뗐음에도 지나치게 조용한 것 아니냐는 반응이 일각에서 나올 정도였다. 취임사를 갈음한 이 회장의 소회는 자못 비장하기까지 했다. 회장 취임 이틀 전 고(故) 이건희 회장 2주기 후 사장단과 만난 그는 "무거운 책임감이 느껴진다. 안타깝게도 지난 몇 년 간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새로운 분야를 선도하지 못했고, 기존 시장에서 추격자들의 거센 도전을 받고 있다"고 냉정하게 현실을 진단했다.  

어느 때보다 어려운 글로벌 경영 환경이 '조용하고 비장한 취임'의 배경으로 해석된다. 지난해 하반기부터 고물가·고금리·고환율 이른바 '3고(高)' 등 각종 대내외 악재가 국내 산업계를 덮쳤다. 잘나가던 삼성의 실적도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올해 전망은 더 암울하다. 지난해보다 더 어려울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

증권가는 당장 1분기부터 삼성전자의 주력 반도체 사업이 적자 전환할 것으로 내다봤다. 더 큰 문제는 삼성 특유의 '초격차'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 회장 말대로 기존 시장의 지배력은 흔들리고, 새로운 분야에선 고전하는 모습을 수시로 노출하고 있다. 

삼성전자 연구원이 기흥 캠퍼스에서 메모리 반도체를 생산하고 있다. (사진제공=삼성전자)
삼성전자 연구원이 기흥 캠퍼스에서 메모리 반도체를 생산하고 있다. (사진제공=삼성전자)

◆흔들리는 '메모리 초격차' 

'초격차'는 2위와의 격차를 벌려 아예 추격조차 불가능하게 만들겠다는 경영 전략이다. 삼성은 모든 사업 분야에서 이러한 초격차를 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삼성은 지난 2009년부터 해당 단어를 공식 석상에서 언급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어느덧 그룹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자리 잡았다. 권오현 삼성전자 상임고문은 동명의 저서에서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격(格, level)'을 높이는 것이 초격차의 진정한 의미"라고 설명했다. 

메모리 반도체 분야가 초격차를 달성한 대표 사례다. 삼성은 과감한 투자와 기술 혁신으로 지난 30여 년간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분야 독보적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최근 삼성의 메모리 반도체 리더십에 파열음이 들린다. 이 회장 말대로 '추격자들의 거센 도전'을 받는 형국이다. 무엇보다 압도적인 점유율이 야금야금 따라잡히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D램 시장 점유율은 지난해 3분기 기준 40.7%로 1분기(43.5%)와 비교해 2.8%포인트 감소했다. 또 다른 메모리 반도체인 낸드플래시 시장 점유율은 같은 기간 35.3%에서 31.4%로 줄었다. 삼성전자의 줄어든 점유율은 경쟁사인 SK하이닉스, 마이크론, 일본 키옥시아 등이 차지했다. 

반도체 후발주자와의 기술력 차이도 크게 좁혀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최근 들어 반도체 기술이 나노 단위로 초미세화되며 발전 속도가 더뎌졌고, 그사이 경쟁자들이 바짝 따라붙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엔 '세계 최초' 기술 타이틀을 미국·중국 업체 등에 내주고 있다. 시장의 수요·단위 면적당 생산성 등 여러 고려 요소가 있는 만큼 무조건 세계 최초가 좋다고 보긴 어렵지만, 경쟁사들의 기술 추격이 무시하기 어려운 수준이라는 지적이 제기된다. 삼성 관계자는 "메모리 산업에서 경쟁 업체의 도전이 거세져 '세계 최초=삼성'이란 상식에 균열이 발생하고 있다"고 언급했다.

이재용(가운데)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해 베트남 하노이 인근의 삼성전자 법인(SEV)을 방문해 스마트폰 생산 공장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제공=삼성전자)
이재용(가운데) 삼성전자 회장이 지난해 베트남 하노이 인근의 삼성전자 법인(SEV)을 방문해 스마트폰 생산 공장을 점검하고 있다. (사진제공=삼성전자)

◆점점 멀어지는 TSMC와 애플

메모리 리더십이 흔들리는 가운데, 오랜 기간 삼성의 초격차 전략이 먹혀들지 않고 있는 분야도 있다. 삼성전자의 핵심 사업인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부문과 스마트폰 부문이다. 두 사업 부문 모두 이전부터 적지 않은 노력을 쏟고 있음에도 1위 사업자인 TSMC와 애플을 따라잡지 못하고 오히려 격차가 벌어지는 상황이다.

우선 파운드리 부문의 경우, 삼성전자가 '2030년 세계 1위'를 목표로 추격 의지를 불태우고 있지만 갈 길이 멀다. 오히려 시간이 갈수록 격차가 커지는 모양새다. 미국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는 지난해 4분기 삼성전자와 TSMC의 글로벌 파운드리 수익 점유율을 각각 13%, 60%로 집계했다. 양사 점유율 격차는 47%포인트로 지난해 1분기(39%포인트)보다 8%포인트 더 벌어졌다. 

스마트폰 부문의 경우, 삼성전자가 지난해에도 판매량 기준 글로벌 점유율(22%) 1위 자리를 지켰으나 '실속'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다. 2위 애플(19%)을 3%포인트 차이로 제쳤으나, 기준을 매출액으로 바꾸면 이야기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매출액 기준 전 세계 스마트폰 시장 1위는 40% 이상의 점유율을 기록한 애플이다. 반면 삼성전자의 점유율은 10% 후반대에서 맴돌고 있다. 삼성전자가 더 많은 스마트폰을 팔지만, 매출은 애플이 월등히 높은 셈이다. 고가 프리미엄 제품 위주로 판매하는 애플과 달리, 삼성전자는 중저가 라인업 비중이 상당히 큰 탓에 이러한 수익성 차이가 생겼다. 일각에서는 최근 프리미엄 스마트폰 수요가 늘면서 삼성전자가 향후 판매량 기준 점유율 1위 자리까지 애플에 내줄 수 있다는 비관적 관측도 나온다. 

3나노 파운드리 양산에 참여한 파운드리사업부, 반도체연구소, 글로벌 제조&인프라총괄 관계자들이 손가락으로 3을 가리키며 3나노 파운드리 양산을 축하하고 있다. (사진제공=삼성전자)
3나노 파운드리 양산에 참여한 파운드리사업부, 반도체연구소, 글로벌 제조&인프라총괄 관계자들이 손가락으로 3을 가리키며 3나노 파운드리 양산을 축하하고 있다. (사진제공=삼성전자)

◆"위기 때 진짜 실력 나와"…올해도 '정공법' 

"좋지는 않습니다만, 이제 진짜 실력이 나오는 거죠."

이 회장은 지난 2019년 청와대에서 문재인 당시 대통령에게 반도체 경기 전망에 대한 질문을 받고 이렇게 답했다. 각종 과제가 산적한 올해도 이 회장의 선택은 '정공법'이다. 위기 때 진짜 실력이 나온다고 강조해 온 만큼, 과감한 투자로 점유율을 확대하고 기술 경쟁에 나설 계획이다. 

메모리 반도체의 경우 삼성전자는 올해 "인위적 감산이나 투자 축소는 없다"는 입장을 거듭 밝혔다. 경쟁사들이 메모리 업황 악화에 따라 줄줄이 감산을 선언하고, 투자 감축에 나선 것과 정반대되는 행보이자, 증권가와 업계의 예상을 뛰어넘는 선택이다. 기저에는 불황기에 경쟁사들과 점유율 격차를 벌려 향후 메모리 업황이 반등할 경우, 더 큰 수익을 내겠다는 계산이 깔려 있다. 업계에서는 남다른 원가 구조를 갖춘 삼성전자만이 할 수 있는 '치킨 게임' 전략으로 평가한다. 

파운드리 분야에서는 기술 우위를 바탕으로 점유율 반등을 노린다. 지난해 6월 세계 최초로 GAA(Gate-All-Around) 기술을 적용한 3nm 파운드리 공정 기반의 초도 양산을 시작한 데 이어 10월에는 2025년 2나노, 2027년 1.4나노 공정을 도입한다는 로드맵을 발표했다. 현재 건설 중인 미국 테일러 파운드리공장 라인도 1개에서 2개로 늘릴 예정이다.

스마트폰 사업 역시 양 대신 질을 높이는 전략으로 전환했다. 폴더블폰 등 기술 혁신을 바탕으로 한 신제품과 갤럭시S 시리즈 등 프리미엄 라인에 힘을 쏟고 있다. 삼성전자가 압도적 점유율을 차지하고 있는 폴더블폰 시장은 올해 전년(1280만대) 대비 44% 이상 성장해 1850만대로 늘어날 전망이다. 최근 공개한 갤럭시 S23에는 애플의 '아이폰14 프로(4800만 화소)'를 월등히 뛰어넘는 2억 화소 카메라와 퀄컴의 새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스냅드래곤8 2세대'가 탑재됐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뉴스웍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