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23.03.29 19:34

#한꼬집: 꼬집는 행위를 연상케 하는 ‘꼬집’은 소금과 설탕, 후추 등의 양념을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 끝으로 집을 만한 분량을 일컫습니다. 손가락 끝의 양념이 음식 맛을 돋우는 것처럼, 유통업계의 관심 있는 현상을 한꼬집 양념을 넣어 집중 조명합니다.
[뉴스웍스=김상우 기자] '칼스버그 맥주'의 국내 유통을 담당해온 골든블루가 최근 칼스버그그룹과의 계약 해지에 억울함을 토로하고 나섰습니다. 글로벌 기업의 횡포이자 갑질이라며 격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데요. 사연을 듣고 보니 단순한 문제가 아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관련 업계의 반응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그동안 곪아왔던 상처가 터졌다며 ‘올 것이 왔다’는 표정입니다. 상황에 따라 수입 주류 시장 전체를 흔들 후폭풍이 있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옵니다.
◆1년 만에 판매 성장률 183%…‘알짜’ 만들어 놓으니
먼저 골든블루가 단단히 화가 난 이유를 살펴보겠습니다. 골든블루는 지난 2018년 5월부터 칼스버그그룹과 계약을 맺고 칼스버그 맥주의 국내 수입 및 유통권을 손에 넣습니다. 골든블루는 계약 체결 이후 칼스버그 맥주의 국내 판로 확대에 큰 공을 세우게 되는데요. 서로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공생관계로 발전하게 됩니다.
골든블루의 성과는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칼스버그 맥주의 2019년 판매량은 전년 대비 183% 늘어났습니다. 코로나 사태로 주류 시장이 크게 흔들린 2020년과 2021년에도 각각 28.3%, 12.7%의 판매 성장세를 보였는데요. 칼스버그그룹도 골든블루의 공을 인정해 2020년 9월 골든블루를 ‘올해의 파트너’로 선정하기까지 하죠.
그랬던 양사 관계가 지난해인 2022년 1월부터 갑자기 틀어지게 됩니다.
칼스버그그룹이 장기계약을 거부하고 골든블루에 2~3개월 단위의 단기계약을 제시한 것입니다. 관련 업계에서는 거대 물량을 취급하는 수입사에게 이러한 단기계약은 사실상 계약을 파기하겠다는 뜻과 마찬가지로 보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단기계약이나 장기계약이나 큰 차이가 없어 보이지만, 수입 주류 특성을 생각해 보면 확연하게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보통 수입 맥주가 선박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오기까지 대략 1개월 반에서 2개월 정도 걸립니다. 계약 기간이 3개월이라면 그 안에 들여온 물량을 최대한 팔아야 하겠죠.
이전에는 장기계약을 발판으로 채널마다 판매계획을 수립해 체계적인 재고관리에 나설 수 있었다면, 단기계약에서는 재고관리 자체가 불가능해집니다. 통상 맥주의 유통기한은 1년이며, 편의점은 유통기한 7개월 이상 남은 제품만 받아줍니다. 이러한 셈법을 고려할 때 대규모 물량을 단기간 유통하기가 쉽지 않아 재고 부담을 잔뜩 떠안을 수 있습니다.
골든블루 입장에서는 손해가 빤히 보이지만, 어찌 된 일인지 단기계약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뭔가 개선의 여지를 찾아보겠다는 ‘희망 고문’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추측해봅니다. 그러나 이후 칼스버그그룹은 캔 제품은 2022년 3월 31일, 병과 생맥주 제품은 8월 31일로 각각 계약 해지일을 통보하며 단기계약도 중단하는 수순을 밟습니다.
칼스버그그룹이 계약 해지일을 달리 설정한 것도 주목할 부분입니다. 통상 편의점과 마트 등에 들어가는 캔 제품은 매장에 제품만 넣어주면 되기 때문에 관리 부담이 거의 없습니다. 반면 음식점과 유흥주점 등에 납품하는 병 제품과 생맥주는 주문 수량이 일정치 않으며, 생맥주 기계 구비와 관리까지 필요합니다. 이는 관리가 쉬운 채널은 빠르게 회수하고, 관리가 어려운 채널은 기한을 넉넉히 둬 금전적 손해를 최소화하겠다는 의도로 비치는 대목입니다.

◆‘신의성실의 원칙’ 걸 수 있지만…계약 특약사항이 '관건'
골든블루는 국내 위스키 제조사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2009년 출시한 ‘골든블루’가 시장 흥행에 성공하면서 그동안 수입 위스키에 의해 좌지우지된 시장 판도를 바꿔놨습니다. 다만 위스키 외 취급 품목이 적다 보니 품목 확대에 큰 갈증을 느껴왔죠. 이에 품목 다변화와 신성장동력 발굴 차원에서 손을 잡았던 곳이 바로 칼스버그그룹입니다.
골든블루는 배포 자료를 통해 지난 5년간 칼스버그 유통을 위해 약 50명을 신규 채용했으며, 새로운 조직인 B&S(Beer and Sprits) 본부를 만드는 등 적극적인 투자에 나섰다고 설명했습니다. 한정판 패키지 출시와 페스티벌 참가, 팝업스토어 오픈, 기자 간담회 등의 다양한 마케팅 활동도 진행했는데, 그간의 투자 비용이 계약 파기로 인해 손실로 돌아왔다는 주장입니다.
업계 한 관계자는 “골든블루가 계약 초기부터 대규모 투자를 단행할 만큼, 칼스버그 맥주를 성장시켜보겠다는 의욕이 대단했다”면서 “투자비 회수를 기대한 시점에서 갑자기 손을 떼라고 하니 배신감이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분위기를 전했습니다.
골든블루는 법적 소송 등 강구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칼스버그그룹에 손해배상을 청구할 계획입니다. 이에 기자는 칼스버그코리아 측의 입장을 듣고자 했지만, 회사 관계자는 질의에 답해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다만 법적 다툼에 들어가더라도 골든블루가 유리한 입장에 설지는 미지수입니다. 이러한 분쟁은 보통 ‘신의성실의 원칙’을 들어 계약 관계의 불합리성을 내세웁니다. 하지만 양측이 계약을 맺을 때 각종 분쟁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 특약사항을 넣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특약사항에 걸린다면 계약 파기의 책임을 묻기가 쉽지 않을 수 있습니다.
골든블루는 칼스버그그룹이 지난해 10월 국내 법인을 설립하고 자체 유통과 마케팅, 물류조직을 구성하는 등, 계약 해지를 위한 사전 작업을 진행한 점도 문제 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계약 위법성을 묻는 조건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시각에 더 무게가 실리고 있습니다.

◆수입 주류 유통의 '치부'…악용되는 관행
문제는 이번 사건이 단순 갈등으로 끝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수입 주류의 어두운 관행을 밖으로 끄집어낸 초유의 사태이기에, 관련 업계는 일파만파 확전될 가능성을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수입주류 시장에서는 공급사와 수입사가 계약을 체결하지 않고 비즈니스를 진행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습니다. 시장에서 인지도를 가진 수입 주류라면 공급사와 수입사가 대부분 계약을 체결했지만, 그렇지 않은 주류제품은 시장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이유로 계약 체결을 유보한 것이죠.
예컨대 A수입사가 B위스키 5만병을 들여와 국내에 판매하길 원합니다. 반면 B위스키 공급사는 A수입사에 최소 10만병 이상의 공급을 제시합니다. A수입사는 B위스키가 시장에서 잘 팔릴지 안 팔릴지 모르는 상황이기에, 재고 부담이 가능한 수준까지만 초기물량을 확보하려는 것이죠. 반대로 수입사는 적정 수준까지 공급해야 수지타산이 맞기 때문에 소량 납품을 꺼릴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같은 이해 상충은 결국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는 암묵적인 비즈니스 관행을 만들어 냅니다.
문제는 이를 악용할 때입니다. 위 사례의 연장선으로 B위스키 5만병을 들여온 A수입사는 시장에서 B위스키가 잘 팔리게 되자 공급사에 20만병을 주문하게 됩니다. 그러나 B위스키 공급사는 50만병 이상을 주문하겠다는 C수입사가 새롭게 등장하면서 B수입사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게 됩니다. B수입사는 계약을 걸어두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를 제기할 수 없는 것이죠.
최근 국내 주류 시장에서 와인 열풍이 불자 이러한 관행이 와인 수입 과정에서도 허다하다고 합니다. 국내 와인 시장은 스테디셀러 품목이 적다 보니 공급사와 수입사 간 눈치게임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수입 주류를 둘러싼 관행들이 이번 사건을 통해 대외적으로 드러난 만큼, 누군가는 표준을 제시해줘야 할 필요성이 생겨났습니다. 이를 아무도 건드리지 않고 방치하면 분명 똑같은 사례가 재발할 것입니다.
취재 과정에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골든블루 이전에 칼스버그 맥주를 공급했던 국내 모 수입사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는 점입니다. 골든블루처럼 판매량을 크게 늘리진 못했지만, 이 수입사 역시 초기 투자 비용이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세계 3대 맥주 브랜드라 자부하는 칼스버그가 한국에서 다음엔 어떤 행보를 할지 궁금해지는 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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