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상우 기자
  • 입력 2025.01.31 17:40
23일 열린 LG배 세계기왕전 결승 3국에서 기권패를 당한 커제 9단이 격한 감정을 표출하고 있다. (출처=바둑TV 유튜브 채널)
23일 열린 LG배 세계기왕전 결승 3국에서 기권패를 당한 커제 9단이 격한 감정을 표출하고 있다. (출처=바둑TV 유튜브 채널)

[뉴스웍스=김상우 기자] 농심의 중국 시장 개척에 큰 힘을 실어준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이 위기에 놓였다. 최근 LG배 기왕전 결승 3번기 '기권패 파문'이 농심신라면배까지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중국위기협회는 기권패 논란을 한국기원에 돌리며 한국 주최의 세계바둑대회 '보이콧'을 선언했다.

31일 바둑계에 따르면, 한국기원은 최근 LG배 기왕전 기권패 논란을 진정시키고자 공식 사과문을 발표하고 설 명절 기간 중국에 관계자를 파견하는 등 수습에 안간힘을 쓰고 있다. 2월 3일에는 긴급 운영위원회를 열고 관련 사태를 논의할 예정이다.

이번 기권패 파문은 중국 커제 9단의 '사석(死石, 상대방에게 잡혀 죽은 돌)' 규정 불복에서 비롯됐다. 한국기원은 지난해 11월 사석은 반드시 바둑통 뚜껑에 두어야 한다는 사석 관리 규정을 신설한 바 있다.

커제는 지난 23일 벌어진 LG배 세계기왕전 결승 3국에서 사석을 바둑통 뚜껑에 두지 않고 탁자 위에 둬 심판의 경고와 함께 벌점 2집을 받았다. 그는 전날 2국에서도 똑같이 사석 관리 규정을 두 차례 어겨 반칙패를 당한 바 있다. 3국에서도 경고와 벌점을 받자 크게 흥분, 카메라 앞에 삿대질까지 하는 기행을 벌였다. 심판은 커제의 불복 의지가 확고한 것으로 판단해 기권패를 선언했다.

기권패로 변상일 9단이 LG배 우승을 차지하자, 중국위기협회는 곧바로 항의에 나섰다. 이튿날 열린 LG배 시상식 불참은 물론, 한국기원 주최 세계대회 불참과 2025 시즌 중국 바둑리그(갑조리그, 을조리그, 여자리그 등)의 한국 프로기사 퇴출 등 각종 보복 조치를 쏟아냈다.

더욱이 중국 언론까지 합세해 커제를 옹호하고 결승 상대인 변상일을 맹비난했다. 이러한 분위기에 중국 주요 커뮤니티에서는 지난 2017년 사드 배치로 인한 '한한령' 보복조치를 재개해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LG배 세계기왕전 결승3번기에서 변상일 9단(왼쪽)과 커제 9단이 수읽기에 여념이 없다. (사진제공=한국기원)
LG배 세계기왕전 결승3번기에서 변상일 9단(왼쪽)과 커제 9단이 수읽기에 여념이 없다. (사진제공=한국기원)

이번 사태로 농심은 당장 곤란한 처지에 놓이게 됐다. 다음 달 17일 열릴 농심신라면배 최종 3차전에서 중국 기사들의 보이콧 가능성에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 3차전까지 살아남은 프로기사는 한국 2명(신진서·박정환 9단), 중국 3명(리쉬안하오·딩하오·셰얼하오 9단), 일본 1명(시바노 도라마루 9단)이다. 만약 중국 측이 농심신라면배 보이콧을 공식화한다면 대회 흥행 차질은 불가피하다.

한국기원 관계자는 "중국위기협회는 2월 11일까지 열리는 한국 주최 세계대회에 불참하겠다는 입장"이라며 "농심신라면배는 11일 이후에 열리며, 중국 측도 별다른 언급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다만, 중국 측이 11일 이후에도 보이콧을 이어갈 가능성에 대해서는 "당장 확답을 드리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을 아꼈다.

지난 1999년에 시작해 올해 26년째인 농심신라면배는 한국과 중국, 일본의 프로기사가 각각 5명씩 출전해 승자가 계속 두어나가는 녹아웃 연승전 방식이다. 한 번에 모든 대국을 소화하지 않고 1차전 4국, 2차전 5국, 3차전에서 나머지 판을 모두 둔다.

농심은 1996년과 1999년에 각각 중국 상하이 법인과 칭다오 법인을 설립하며 중국 시장을 적극 공략했다. 당시 중국에서 바둑열기가 고조되자, 농심신라면배가 회사 대표 제품인 '신라면' 홍보에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다. 특히 수많은 대회에서 드라마틱한 승부를 연출하며 세계바둑대회 중 흥행성이 가장 높은 대회로 발돋움했다.

농심신라면배 위상과 함께 농심의 중국 법인은 지속성장을 이어가는 중이다. 지난해 3분기 기준으로 중국 3개 법인 합산 매출은 약 2225억원이다. 미국법인(4617억원)에 이어 두 번째로 높다.

앞서 농심은 2017년 중국 정부의 한한령 보복 조치로 매출 타격을 입은 아픈 기억이 있다. 2016년 1693억원의 매출이 2017년 1465억원으로 쪼그라들었다. 이번 사건이 단순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면 농심신라면배 진행이 큰 부담으로 돌아올 수 있다.

지난해 12월 부산에서 열린 제26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에서 한국 신민준 9단(왼쪽)과 중국 셰얼하오 9단이 맞붙은 모습. (사진제공=한국기원)
지난해 12월 부산에서 열린 제26회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에서 한국 신민준 9단(왼쪽)과 중국 셰얼하오 9단이 맞붙은 모습. (사진제공=한국기원)

바둑계 한 관계자는 "기권패 파문은 결국 양국의 룰 차이를 강압적 방식으로 규정할 수 있느냐가 쟁점"이라며 "한국과 일본은 사석도 집으로 계산되는 룰을 따르지만, 중국은 바둑판에 놓인 돌만 계산하는 룰을 택하면서 별도의 사석 관리 규정이 필요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한국기원이 사과문을 발표하고 자발적으로 고개를 숙인 상황이라 다음 수순은 어느 정도 정해진 것 같다"며 "관련 룰을 폐기하는 쪽으로 중국 측을 달랠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유통업계는 만약 이번 사건이 조기 종식되지 않는다면 예상치 못한 후폭풍에 직면할 수 있다는 관측이다. 시진핑 중국 주석의 친구이자 중국 바둑계 실세인 녜웨이핑 9단은 최근 CCTV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사건을 두고 "완전히 미쳤다"라는 수위 높은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유통업계 한 관계자는 "바둑계 단순 사건이 한국산 제품 불매운동으로 전개되는 최악의 시나리오도 염두에 둘 수 있다"며 "사드 사태 때 중국 여론의 예측 불가능함을 경험했기 때문에, 이번 사건도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엉뚱한 방향으로 번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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