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25.06.04 03:00
"세상이 변하지 않으면 세상을 바꾸겠다"

[뉴스웍스=원성훈 기자] 이재명 대통령의 생애는 한마디로 말해 '자수성가의 삶'으로 표현된다.
그가 과연 어떠한 삶의 궤적을 그려왔기에 '기본사회'를 꿈꾸게 됐고, 어떤 첫마음으로 정치를 시작하게 됐으며, 어떤 역경을 딛고 대통령이 될 수 있었는지를 조명해본다. 이는 총 3부작으로 그의 생애를 추적하는 방식으로 접근했다.
이재명 대통령이 태어난 곳은 경상북도 안동군 예안면 도촌동 지통마을이다. 정확히는 영양군, 봉화군, 안동시가 만나는 예안면 청량산 자락에서 태어났다. 원래는 5남 4녀 중 일곱째로 태어났지만, 누나 둘이 요절하면서 다섯째가 됐다. 이후 1976년 경기도 성남시로 이사했다.
이 대통령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경기도 성남시로 이사를 왔고, 너무 가난해서 중학교로 진학하지 못하고 성남 상대원 공단의 공장에서 소년공 생활을 했다.
그의 첫 직장은 염산과 황동을 다루는 목걸이 공장이었고, 두 번째 직장은 붕산으로 땜을 하는 공장이었는데 사장의 야반도주로 월급을 떼였다. 세 번째 공장에서는 고무벨트에 왼손이 감기는 산재사고를 당해, 고무 조각이 왼손 중지에 박혔는데 파편이 아직 박혀 있다.
1977년 초에 상대원동 제1공단 옆의 제2공단에 상업용 냉장고를 만드는 아주냉동에서 일하다가 산재를 두 번이나 당했다고 한다. 산소용접을 배워보려했다가 회사가 거부해서 함석 절단일을 하였는데 함석판에 손등이 찢어져 뼈가 드러나는 사고를 두 번 당했다. 이후 17살이던 1980년에 오리엔트정공의 계열사인 오리엔트시계에 입사한다. 오리엔트정공은 자동차 부품 제조업체인데, 이 당시에도 회사 사정이 다른 회사보다는 나았다고 한다.
이처럼 지독한 가난과 차별속에서 살아가야 했던 그는 유년기 내내 '누구도 탈락하지 않는 삶과 모든 국민의 기본적인 삶이 보장되는 사회'를 꿈꿨고 그것이 이후 그의 트레이드 마크처럼 자리하게 된 '기본사회' 개념의 맹아가 됐다.
이후 검정고시를 통해 1982년 중앙대 법대에 입학했는데 당시 학력고사에서 서울대 상경계열 입학이 가능한 285점을 받았지만 대학에 다니려면 장학금과 생활비가 필요했기에, 결국 서울대를 포기하고 입학금 면제에 3학년까지 등록금 면제는 물론 매달 20만원의 생활비가 제공되는 중앙대 법대를 선택했다. 당시 공장 월급이 8만원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20만원은 돈 걱정을 하지 않고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그는 선배들에게 사법시험에 관해 들으며 장애인이라 취업이 힘든 자신에게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 사법시험에 도전하게 됐다. 중앙대 법대 3학년 시절이던 1984년 사법시험 1차 합격 후 1985년 4학년 때 2차에 낙방했다. 이듬해 학교를 졸업하고서 1986년 10월 23일 제28회 사법시험에 최종 합격했다.
1987년 사법연수원 18기에 입소했다. 실제 이재명의 연수원 성적은 297명 중 60위권으로, 판사는 지방권 임용 가능, 검사는 상위권 임용이 가능한 수준이었으나 전부 다 거부했다고 한다. 사법연수원을 마치고 나서는 26살의 젊은 나이로 경기도 이천에 노동법률상담소를 차리고 3년 동안 노동자, 농민을 위한 권익활동을 했다. 변호사 개업 직후 김혜경과 결혼했고 아들 둘의 아빠가 됐다.
2004년, 이재명이 본격적으로 유명해진 사건이 생긴다. 바로 성남시립병원 설립 운동 당시 성남시민들은 공공 의료원을 설립하는 것을 목표로 국내 최초로 1만8595명의 서명으로 주민발의 조례를 했지만 성남시의회는 이를 '심사보류' 했다.
이 대통령은 당시 심의보류가 선포된 후 당시 주민 대표 중 한사람으로서 성남시민들과 의회에서 항의하다가 주민 30여 명과 같이 연행되며 특수공무집행방해 및 공용물건손상죄를 선고받았다. 또한 이 시절에 음주운전이나 검사 사칭 공범, 특수공무집행방해 등으로 처벌을 받은 일 등이 나중에 그의 정치인생에 두고두고 악영향을 끼쳤다. 그는 이 당시 한 교회의 지하실에서 숨어 지내면서 '세상이 변하지 않으면 세상을 바꾸겠다'며 그런 정치인생을 살아갈 결심을 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