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25.10.08 12:00

최근 서울고등법원이 내린 판결 하나가 부동산 시장에 큰 경종을 울렸다. 공인중개사가 대리인의 권한을 제대로 확인하지 않아 임차인이 보증금 반환청구권을 상실한 사건에서 법원은 중개업자의 책임을 인정하며 배상 판결을 내린 것이다.
전세 보증금을 둘러싼 분쟁이 갈수록 늘어나는 현실 속에서, 이번 판결은 중개업자의 '대리권 확인 의무'를 명확히 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사건은 200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차인 A씨는 공인중개사 B씨의 주선으로 한 아파트 전세계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집주인 본인이 아닌 E씨가 '대리인'이라며 나타났고, A씨는 보증금 2억2000만원을 지급했다.
계약 만료 후 보증금을 돌려받으려 했지만, E씨는 집주인으로부터 정식 권한을 부여받지 않은 가짜 대리인이었다. 결국 A씨는 집주인에 대한 반환청구권을 상실했다.
재판부는 "중개업자는 대리인이 진정한 권한을 보유했는지 확인할 주의의무가 있다"며 원고 A씨의 손을 들어줬다. 다만 임차인 역시 대리권 확인을 소홀히 한 과실이 있다며 책임을 50%로 제한했다. 이로써 중개업자는 1억1000만원, 한국공인중개사협회는 공제 한도인 1억원을 배상하게 됐다.
이번 사건은 특정 임차인의 불운으로만 볼 수 없다. 전세금 반환 분쟁은 최근 몇 년 사이 급증하고 있다.
대법원 통계에 따르면 전세금반환소송 본안 접수 건수는 2023년 7789건으로, 전년(3720건) 대비 109.4% 늘었다. 집값 하락과 역전세난이 겹치면서 보증금 반환을 둘러싼 갈등은 이제 사회적 문제로 자리 잡았다.
중개업자의 의무는 단순히 매물을 연결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선량한 관리자로서 거래 당사자의 권리를 확인하고, 특히 대리인이 개입한 경우 그 권한을 본인에게 직접 확인하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인감증명서, 위임장만 믿고 서류 확인에 그친다면 임차인 피해는 막을 수 없다.
임차인 역시 계약 과정에서 스스로 꼼꼼히 확인해야 한다. 계약 당일 본인 확인, 인감증명서 진위 여부 점검, 위임장 효력 검토 등 기본적 절차를 소홀히 하면 피해는 고스란히 본인에게 돌아온다.
부동산 거래는 국민 생활의 가장 중요한 기반 중 하나다. 전세 제도는 여전히 수많은 가구의 주거 안정 수단이지만, 계약 과정의 작은 구멍 하나가 수억 원의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 이번 판결은 중개업자의 주의의무를 다시 한번 상기시키며, 동시에 법·제도적 보완 필요성도 제기한다.
앞으로는 중개업자 협회 차원에서 대리권 검증 의무를 강화하고, 임차인에게도 사전 점검 체크리스트를 제공하는 등 예방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 무엇보다 '본인 직접 확인 절차'를 의무화하는 실무 관행이 확산돼야 한다.
[엄정숙 법도 종합법률사무소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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