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25.11.05 19:25

[뉴스웍스=채윤정 기자]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가 26만대 그래픽처리장치(GPU)를 한국에 공급하기로 한 속내는 급부상하고 있는 '인공지능(AI) 거품론'을 걷어내는 것이 시급하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5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엔비디아가 지난달 31일 26만대의 GPU 공급을 확정하면서 우리나라는 기존 보유한 6만5000대를 포함 총 32만대의 GPU를 보유하게 됐다. 이에 따라 한국은 미국과 중국에 이어 글로벌 3위 GPU 보유 국가로 급부상할 전망이다.
단일 국가에 26만대의 GPU를 공급하는 '통 큰' 결정에 대해 업계 전문가들은 'AI 거품론'을 진화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한다. AI 산업에서 독보적 지위를 가진 엔비디아의 황 CEO가 가장 두려워하는 게 AI에 대한 시장의 의심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려를 불식하기 위한 가장 긍정적인 사례를 보여줄 수 있는 국가가 바로 '한국'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관측된다.
최근 미 증시에서는 AI 거품론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지난 9월 AI 챗봇의 대명사인 '챗GPT'를 만든 오픈AI가 엔비디아로부터 최대 1000억달러를 투자받아, 다시 엔비디아 GPU를 구매한다고 발표한 것은 하나의 도화선이 됐다.
오픈AI의 기업가치는 5000억달러(약 72조원)로 평가된다. 그러나 뚜렷한 수익 모델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적자는 이어지고 있다. 이에 오픈AI가 엔비디아에 투자금을 받아 엔비디아 제품을 사는 것은 '돌려막기'가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AI 거품론이 거론된 하나의 이유다.

엔비디아는 AI 거품론을 걷어내기 위해 세계 최고 테스트 베드 구축이 꼭 필요한 상황이다. 무엇보다 챗봇 수준이 아닌, 실제 물리적인 환경에서 운용할 수 있는 '피지컬 AI'로 AI의 유용성을 실증하는 것이 절실하다.
피지컬 AI는 AI가 현실 속으로 나오는 것을 뜻한다. 로봇, 자율주행차, 공장 자동화기기 등 물리적 장치들이 AI를 통해 스스로 작업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한다. 환경 변수 등을 고려한 수많은 동작 제어 시뮬레이션을 AI를 통해 수행·학습해 개발 기간을 혁신적으로 단축하고, 현실 세계에서 사람을 대신해 부가가치를 창출한다.
AI가 미래산업의 대세라는 점에 이견이 없지만, 거품론이 대두되면 발목을 잡힐 수 있다. 유사한 사례로 배터리 캐즘(일시적 정체)을 들 수 있다. 배터리의 성장성은 확실하지만, 전기차에 대한 회의론이 밀려오면서 배터리 산업은 2년째 부진을 거듭하고 있다.
전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을 지낸 이종호 서울대 전기정보공학부 교수는 "한국은 테스트 베드를 구축하면 긍정적인 시너지를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국가다. 한 부분이 1등이라기보다는 조선, 국방, 반도체, AI 소프트웨어, 방산, 자동차, 문화, 푸드 등 모든 부문을 잘 한다"며 "해외 전문가들과 말해보면 한국에 테스트 베드를 구축하는 것을 간절히 희망한다. 엔비디아도 마찬가지다. 한국을 통해 성공적으로 가장 큰 결과를 보여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피지컬 AI에 대해서는 "로봇을 생각하면 된다. 기계적 충격 없이 사람처럼 부드러움을 갖춰야 하는데, 이를 가능케 하는 게 피지컬 AI"라며 "제조, 서비스, 국방 등 업무를 수행하려면 지능이 들어가야 한다. 로봇에 지능이 들어가는 것을 피지컬 AI로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엔비디아는 삼성전자·SK그룹·현대차그룹·네이버가 피지컬 AI에 가장 특화돼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삼성전자는 올해 초 로봇 플랫폼 기업인 레인보우로보틱스를 인수했다. 레인보우로보틱스는 피지컬 AI 플랫폼 기업인 디스펙터와 협력관계도 구축했다. 반도체 설계에도 AI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
현대차그룹은 자율주행과 로봇 회사를 보유하고 있다. 자율주행 기술을 개발하는 자회사인 모셔널과 포티투닷에 수년간 대규모 투자를 하는 중이다. 또한 지난 2021년 세계 최고의 로봇 회사인 보스턴다이내믹스의 지분 80%를 인수했다. 이를 통해 이동형 로봇, 물류 로봇, 휴머노이드 분야로 사업을 확장하고 있다.
네이버도 로봇 AI 파운데이션 모델 상용화를 선언했고, 산업용 AI 휴머노이드 로봇 솔루션 개발에도 앞장서고 있다. 네이버는 거대언어모델 '하이퍼클로바X'를 개발한 바 있는데, 이를 위해 엔비디아로부터 DGX 슈퍼팟을 초기에 구입했다. 다시 말해 엔비디아의 주요 고객사라는 뜻이다.

SK그룹은 SK하이닉스를 통해 12단 HBM3E를 오랜 기간 동안 엔비디아에 공급해 온 혈맹 같은 파트너사다. GPU를 통해 제조 AI 클라우드를 구축하는 등 피지컬 AI 확산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이종환 상명대학교 교수는 "AI 기술이 모든 영역에 침투한 시점에 GPU만 확보된다면 피지컬 AI·로보틱스·자율주행·양자 컴퓨팅 등 많은 업무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다"며 "GPU로 산업 구조를 한 단계 도약시킨다면 한국은 산업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어 "엔비디아는 삼성전자와의 협력 관계를 더 깊게 가져가야 한다"면서 "대만 TSMC는 메모리를 직접 만들지 않고, 파운드리 잔여 물량에도 한계가 있다. 삼성전자의 메모리와 파운드리 능력을 적극 활용한다면 큰 이득이 있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삼성전자·현대차그룹·SK그룹·네이버는 엔비디아의 GPU를 통해 피지컬 AI를 구축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목표한다. 또 정부도 엔비디아로부터 GPU 5만대를 구입해 국가 AI 컴퓨팅 센터와 국내 클라우드 서비스 및 정보통신(IT) 기업인 NHN클라우드, 카카오, 네이버클라우드에 배치해 '소버린(주권) AI' 인프라에 투자하기로 했다.
하지만 엔비디아의 GPU 공급 대상에 LG그룹만 빠져 있어 의문을 자아낸다. LG그룹은 삼성전자·SK그룹·현대차그룹과 함께 4대 그룹으로 묶인다. 특히 LG그룹은 AI 연구원을 설립해 '엑사원' AI 등을 지속적으로 선보이는 등 AI 사업에 큰 공을 들여왔었다.
이종환 교수는 "LG전자는 아무래도 생활가전을 핵심으로 하고 있어 엔비디아의 연관성이 떠오르지 않는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메모리 공급 생태계 안에 있다"며 "GPU와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게 없다. 전략적 파트너십은 오랜 유대관계에 있던 회사들을 선정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관련 업계에서는 LG그룹이 정부가 구하는 GPU 5만장 중 일부를 받을 것이라는 관측도 제기하고 있다. 다만, 정부 확보분 배분은 첫 번째가 대학, 두 번째가 혁신 중기를 대상으로 할 것으로 보여, LG그룹에 어느 정도 물량이 배정될지는 미지수다.
이에 대해 LG전자 관계자는 "우리는 소버린 AI 개발에 참여하고 있다"며 "이번 엔비디아와 협력은 단순히 GPU 구입 여부의 차이일 뿐으로, 반드시 GPU를 구입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정부 GPU 물량 중 일부를 확보할지에 대해서는 "정부는 GPU를 통해 소버린 AI를 구축하려는 것으로 안다. 아직 확답할 수 있는 게 없다"고 덧붙였다.
LG전자는 4개사가 엔비디아로부터 GPU를 구매한다고 발표한 지난달 31일, 엔비디아와의 협력 관계를 소개하는 보도자료를 냈다. LG전자 측은 "새롭게 하는 사업은 아니며 이전에 해왔던 내용을 정리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엔비디아 GPU 구매 대상에서 제외된 우려를 불식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