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25.03.31 18:47

임대차계약을 체결할 때 특약 기재는 반드시 필요할까? 즉, 임차인이 보증금채권을 담보로 대출을 받을 때 대출기관이 보증금을 직접 지급할 수 있을지 고민에 휩싸이는 경우가 많다.
최근의 사례다. 서울 주요 학군 지역에 소재한 오피스텔 집주인이 보증금과 월세가 병존하는 '반전세' 계약을 세입자와 체결하고 계약금 지불을 끝마쳤다. 반전세라 보증금 액수가 낮았고, 임차인은 대출과 관련된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특약에 '임대인은 임차인의 보증금 대출에 협조한다'라는 문구가 기재되지 않은 터다.
이후 잔금일인 이삿날에 집주인(임대인)은 4개의 대부업체로부터 잔금에 해당하는 금액이 입금돼 깜짝 놀란다. 임대인은 임차인에게 이 사실을 즉각 항의했고, 이에 임차인은 보증금이 없는 단기 임대차를 요구하는 등 서로 간의 갈등으로 번지고 만다. 결국 임대인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양측의 계약은 파기에 이른다. 이럴 때 임대차계약 의무를 불이행한(계약 파기의 귀책사유) 사람은 누구일까?
정답은 '임대인'이다. 1심 법원은 '특약에 관련 내용이 없더라도 임대인이 대부업체로부터 보증금을 받았다면 문제가 없다'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집주인인 임대인은 지급 주체가 누구든지 보증금만 받으면 되고, 임차인이 월세를 안 내면 보증금에서 차감한 뒤에 퇴거 및 명도 청구를 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취지다.
그러나 법원의 이러한 입장은 임대차 실무 현장과 상당한 괴리가 있다. 임대차 실무에서는 임차인이 보증금반환채권을 담보로 대출을 받을 경우, 실제 대출이 가능할지 그 여부를 확인한 뒤에 임대인의 승낙이 이뤄져야만 계약이 체결된다. 공인중개사는 계약 체결 시 특약사항으로 '임대인은 임차인의 보증금 대출에 협조한다'는 취지의 문구를 기재한다. 임대인 입장에서는 임차인이 보증금 대출을 받을 수 있는지 확인이 가능한 것이다.
특히 학군지나 역세권 주택의 임대인인 경우, 보증금 대출도 못 받는 임차인과 계약을 체결할 이유가 딱히 없을 것이다. 또한 임차인이 보증금을 담보로 대출을 받으려면 임대인이 대출기관의 절차에 협조할 필요가 있다. 임차인이 대출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다고 위와 같은 특약을 생략한다면, 임대인은 임차인의 보증금 대출을 위해 협조할 이유도 없다. 그래서 공인중개사들 사이에서는 임대차계약 시 임차인이 보증금 대출을 받기로 당사자 간에 합의된 경우, 특약으로 '임대인의 협조 문구'를 기재하는 것이 관행으로 확립됐다.
더욱이 임대인 입장에서 반전세는 임차인의 신용도 여부를 꼼꼼하게 따져봐야 한다. 반전세는 월세가 지급되는 만큼, 보증금 규모가 절반 이상 줄어들 가능성이 있다. 임차인의 손해배상책임을 담보할 금액이 그만큼 감소하게 된다는 의미다. 만약 임차인이 월세를 내지 않아서 임대인이 보증금 차감 및 계약 해지, 명도와 관련해 6개월~1년에 걸친 법적 분쟁 등을 겪게 된다면 상당한 비용과 정신적 고통을 안게 된다.
여기에 분쟁 과정에서 임차인이 임차권등기명령을 신청하면 매우 곤란한 상황이 벌어진다. 추후 법원 판결로 기록이 말소가 되더라도 임대인에게 일종의 '전과'처럼 따라붙어 불이익으로 작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따라서 반전세를 하려는 임차인이 금융기관 대출도 받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임대인은 굳이 해당 임차인과 계약을 체결할 이유가 없다. 계약 체결 전에 그러한 사정을 미리 알았다면 임대인은 임대차계약을 체결하지 않을 것이 자명하다.
임대인과 임차인의 형평성 문제도 엄밀히 따져볼 일이다. 법원은 임대인이 보증금 반환을 하지 못할 정도로 근저당과 가압류 등이 설정된 집을 임대했을 때, 이를 임차인에게 알리지 않는다면 '계약 체결 당시 알았다면 계약을 체결하지 않았을 사정을 숨긴 것'이라 판단해 '사기'로 규정한다.
이를 반대로 적용해보자. 임차인이 대부업체로부터 연 20%에 해당하는 이자를 내는 것 외에 보증금을 마련할 방법이 없는 상황임에도, 임대인에게 이를 알리지 않고 반전세 임대차 계약을 체결한다면 어떻게 판단할까? 이후 대부업체가 보증금 잔금을 지급하는 것은 임대인 입장에서 사기에 해당할 수 있는 것이다. 임대인이 계약 체결 당시에 보증금을 대부업체로부터 차용하는 상황임을 알았다면 과연 어떤 임대인이 해당 임차인과 계약 체결을 할지 의문이다. 더구나 서울 학군지 역세권 주택을 보유한 임대인이라면 그럴 생각이 털끝만치도 없을 것이다.
공인중개사들이 관행적으로 사용하는 임대차계약서에는 "임차인은 임대인의 동의 없이는…(중략)…임차권 양도 또는 담보제공을 하지 못하며…"라는 조항이 기재돼 있다. 과거 하급심 법원은 위 조항을 합리적으로 해석해 임대인의 사전 동의 없이 보증금반환채권을 담보로 제공하는 것을 금지하는 조항으로 봤지만, 대법원은 문언 해석을 강조하면서 보증금반환채권을 담보로 제공하는 경우를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고 봤다. 대법원은 임차인이 약자임을 우선적으로 고려하지 않았을까 싶다.
기본적으로 집주인에 비해 임차인이 약자인 경우가 많고, 전세 사기 등으로 선량한 임차인이 손해를 보는 경우가 많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악독한 집주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임대인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고 집을 '엉망'으로 만들며 차임도 내지 않은 채 명도 소송 후 집행까지 '잠수'를 타는 등 선량한 임대인을 애먹이는 임차인도 적지 않다.
임차인이 등기부를 보고 보증금을 제대로 담보할 수 있는지 확인하는 것처럼, 임대인도 반전세나 월세 계약에서 임차인이 월세를 낼 최소한의 신용도가 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계약 체결 당시에 월세도 내기 힘든 임차인을 세입자로 들였다가 이후 차임 미지급으로 겪는 고통을 생각하면 임대인의 임차인에 대한 신용도 확인은 법적으로 보장받을 필요가 있다.
정리하자면 임차인이 보증금 반환 대출을 받을 수 있음을 확인한 후에 계약을 체결하고, 이때 특약사항으로 '임대인 협조' 문구를 기재하는 관행은 임대인의 위와 같은 합리적 기대나 이익을 보호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임차인의 피해를 방지하고 구제하기 위한 법 개정과 국가적 차원의 지원 등은 여러 대책이 마련된 만큼, 선량한 임대인의 이익을 더 이상 무시해서는 안 된다. 최근 일부 법원 판결은 임대인의 최소한의 이익을 위해 업계에서 애써 만든 관행마저 무력화하는 것 같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전민재 법무법인 트리니티 공정거래 전문변호사·가맹거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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