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23.05.18 08:47
[뉴스웍스가 만난 사람] "반도체 기업은 '국가대표'…표 생각 말고 순수하게 지원해야"

[뉴스웍스=전다윗 기자] 최근 한국 경제의 대들보 반도체 산업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고 있다.
국내 반도체 산업을 이끄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지난해 말부터 연이어 최악의 실적을 발표했다. 양사 반도체 적자가 1분기에만 8조원에 육박한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부문 손실로 오는 2분기 15년 만에 분기 적자를 기록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대외 환경도 녹록지 않다. 미국과 중국이 반도체 공급망에서 서로를 배제하려는 움직임이 격화되면서, 그사이에 놓인 우리나라도 반도체 전략을 두고 고심에 빠졌다. '위기론'은 항상 나온다지만, 현재 안팎에서 들려오는 경고음은 심상치 않다는 것이 업계의 공통된 견해다.
지난 15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양향자 무소속 의원을 만났다.
양 의원은 1985년 고졸 학력으로 삼성전자에 입사해 여성으로서 처음 임원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2014년 1월부터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 플래시설계팀 상무이사로 근무하다 2016년 1월 더불어민주당 입당을 시작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2020년 당선되며 최초의 반도체 엔지니어 출신 국회의원이 됐다. 21대 국회에서 K-반도체가 직면한 위기를 진단하고, 해법을 모색하는 문답을 주고받을 유일한 전문가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양 의원은 이러한 전문성을 인정받아 야당 출신임에도 여당의 반도체특위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한국, 메모리 초격차 유지가 최우선 과제
"팻 갤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이전에는 석유가 어디서 생산되느냐가 중요했다면, 이제 반도체가 어디서 생산되느냐에 세계 경제 패권이 달렸다고 말했다. 동의한다. 반도체 패권을 사수하는 것이 결국 우리의 전략이다. 요즘은 반도체 기술력이 어느 위치에 있느냐에 따라 국가의 국력이 결정된다."
양 의원은 결국 '기술력'이 위기 극복의 열쇠라고 거듭 강조했다. '지정학(geo-politics)' 중심의 국제 질서가 '기정학(tech-politics)'으로 재편되고 있는 상황에서, 미래 산업의 핵심인 반도체 패권을 쥐는 국가가 전 세계 경제·산업·안보·외교적 주도권을 쥐게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특히 메모리 반도체 초격차를 사수하는 데 사활을 걸어야 한다고 봤다. 삼성전자를 필두로 한 국내 기업들은 지난 30여 년간 메모리 반도체 산업을 이끌어왔다. 하지만 최근 한국의 메모리 반도체 초격차가 흔들리고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압도적 점유율이 야금야금 따라잡히는 가운데, 후발주자와의 기술력 차이도 크게 좁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양 의원은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분야를 키워야 한다는 필요성이나 방향성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하고, 선행되어야 할 것이 메모리 반도체 초격차 유지"라며 "앞으로 챗GPT 등을 포함해 모든 산업에서 메모리 반도체 수요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메모리 반도체의 경쟁력을 상실한다면, 우리의 유일한 무기를 잃었다고 보면 된다. 재앙 같은 일"이라고 단언했다.
한국이 대체 불가한 기술력을 유지한다면 미중 반도체 패권 다툼도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내놨다.
양 의원은 "미국이 중국을 컨트롤하는 이 상황이 우리에게는 상당히 좋은 기회"라며 "미국과 중국은 모두 중요하지만, 결이 다르다. 거의 모든 반도체 원천기술은 미국에 있다. 미국 없이는 반도체 산업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보면 된다. 죽고 사는 문제다. 반면 중국은 우리에게 시장이다. 이건 먹고 사는 문제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즉, 미국과의 전략적 동맹은 앞으로 더 견고히 가져가야 한다. 중국 눈치보며 주저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우리가 굳이 중국을 배척하거나 도외시할 필요는 전혀 없다. 협력적 공생 관계를 계속 가져가야 한다"며 "이러한 외교 협상 테이블에서 우리가 우위에 설 수 있게 하는 힘, 그것은 기술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의사? 고달파요"…반도체 엔지니어가 꿈인 대만
"개별 기업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국가 전체의 문제라고 생각해야 한다." 양향자 의원은 국내 반도체 산업이 겪고 있는 복합 위기를 남의 일처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을 경계했다.
그는 "지금까지는 우리 기업들이 홀로 잘 해왔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반도체는 기업 대 기업의 싸움이 아니다. 국가 대항전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며 "국가가 얼마나 제대로 된 로드맵을 세우고 뒷받침하느냐에 성패가 달렸다"고 강조했다. 이어 "반도체 기업들은 국가대표 선수다. 이들이 약하면 한국이라는 나라는 국제사회에서 제대로 된 역할을 하지 못한다고 보면 된다. 국가의 존립 위기가 오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우리 반도체 기업이 휘청이면, 곧 대한민국 전체가 흔들릴 수 있다는 의미다.
반도체, 더 나아가 과학기술에 대한 범국가 차원 인식 제고의 필요성도 역설했다.
양 의원은 "최근 대만에 갔다. 꿈을 물으니 어린이부터 대학생까지 다 엔지니어라고 답했다. 의사, 변호사를 최고로 쳐주는 우리나라랑 인식 자체가 다르다. 오히려 '의사는 너무 고달프다'고 하더라. 실제로 대만 의사 연봉은 엔지니어와 비교도 안 되게 낮다"며 "대만은 반도체 등 과학기술이 국가 발전의 원동력이란 생각이 나라 자체에 가득 차 있다. TSMC가 대만의 자존심인 이유다. 반면 우리나라의 TSMC 포지션인 삼성에 대한 인식은 어떤가. 그저 재벌이라고 본다. 인식이 차이 나니 자연히 처우가 달라지고, 인재풀의 격차도 생긴다"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반도체 업계에서 추정하는 TSMC의 반도체 R&D 인력은 약 6만명으로, 삼성 파운드리(2만명)의 3배 수준이다.
이어 양 의원은 "특히 정치권의 반도체에 대한 그릇된 인식은 큰 문제다. 다른 나라들은 정말 국가의 역량을 총집결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반도체마저 정쟁의 도구, 총선의 수단으로 쓴다"며 "국가대표인 기업들을 '순수하게' 지원할 필요가 있다. 어느 쪽 표가 많을지 총선 구도 유불리에 맞춰 잣대를 들이대는 건 제약이고, 죄악이다"라고 비판했다.
양 의원은 '선택과 집중'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불필요한 비용을 줄이고, 반도체 등 첨단 산업에 그 역량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제언이다.
그는 "인구 2300만명의 대만의 1년 예산은 117조원이다. 우리나라 인구가 5000만명쯤 되니, 넉넉잡아 300조원이면 충분히 1년 국가를 운영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런데 우리나라 예산은 630조원이다. 이렇게 많은데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비용이 30조원밖에 없다고 한다"며 "다시 말해 600조원이 고정 비용인 것인데, 불필요한 고정 비용을 줄여 예산을 절반 수준으로 낮춰야 한다. 한정된 자원을 제대로 쓰는 것에 대한 진지한 논의를 시작해야 할 때"라고 당부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