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25.04.02 12:09
현지 조달 확대로 국내 일자리 위협…저출산·실업률 상승 우려
전문가들 "산업 공동화 대비한 정부·기업의 전략적 대응 시급"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전 세계 국가들을 대상으로 상호관세 적용이라는 초강수를 뒀다. 보편관세 부과는 미국의 글로벌 패권 경쟁국인 중국이 유일했으나, 이제는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가 본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관세 유탄을 맞을 처지다. 거대 소비시장인 미국의 장벽이 높아지면 수출로 먹고 사는 대한민국에는 큰 충격이다. 중국발 공급 과잉에 허덕이는 판에 트럼프 행정부 관세 조치까지 이뤄지면 반도체·자동차·철강·배터리 등 국내 수출 주력 업종들은 현지화 전략을 강화할 수밖에 없다. 남는 것은 국내 산업 공동화(空洞化)다. 뉴스웍스는 3회에 걸쳐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 후폭풍이 국내 산업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지와 공동화 방지를 위해 어떤 전략을 취해야 하는지 짚어본다.
[뉴스웍스=정현준 기자] 미국의 고율 관세 부과 가능성에 대응해 국내 대기업들이 미국 내 생산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이 과정에서 국내 협력업체들이 일감 감소와 구조조정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완성차를 비롯한 배터리, 전장, 철강 등 주요 산업 전반이 '미국 중심 생산체계'로 전환되며, 국내 생산 비중 축소와 협력업체 고사 가능성이 제기된다.
최근 현대차그룹이 향후 4년간 210억달러(약 31조원)를 미국에 투자하겠다고 밝힌 데 이어, 삼성전자·LG화학·SK그룹 등도 미국 내 공장 및 연구개발(R&D) 센터 투자를 검토 중이다.

2일 대한상공회의소가 최근 국내 제조기업 2107개사를 대상으로 미국 관세 영향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 기업의 60.3%가 트럼프 전 대통령의 관세 정책으로 인해 직·간접 영향을 받고 있다고 답했다. 이 중 미국 수출기업에 부품·원자재를 공급하는 기업(24.3%)과 미국에 완제품을 수출하는 기업(21.7%)이 가장 많았고, 배터리(84.6%), 자동차·부품(81.3%) 업종이 특히 높은 영향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관세의 영향이 현실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 기업들의 대응은 제한적인 것으로 조사됐다. 미국의 관세정책에 대한 대응 수준에 대해선 동향 모니터링(45.5%), 비용 절감(29.0%) 등이 대부분이었고, 대응 계획이 없다고 답한 기업도 전체의 21%에 달했다.

소재·부품·장비(소부장) 분야의 중소기업들은 대응 여력이 더욱 부족한 것으로 드러났다. 영향권에 있는 중소기업 4곳 중 1곳(24.2%)은 대응 계획이 없다고 답했으며, '생산 비용 절감'이나 '관세 회피 대응책'을 마련 중인 기업 비중도 대기업에 비해 현저히 낮은 수준이었다.
이 같은 흐름은 특히 국내 협력업체에 직접적인 타격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지난해 5월 현대차·기아가 발표한 '2024 동반성장 추진 현황'에 따르면, 2023년 말 기준 두 회사와 40년 이상 거래해 온 협력사는 105개사로 집계됐다.
이는 현대모비스, 현대위아 등 계열사를 제외한 1차 부품 협력업체만을 포함한 수치다. 해외 동반 진출 협력업체는 1·2차 협력업체를 포함해 총 690개사지만, 국내에는 1만5000여 개에 달하는 자동차 부품업체가 존재한다. 이 중 다수가 2·3차 협력업체로, 외주 의존도가 높고 경영 기반이 취약한 실정이다.
관세 부담으로 대기업들이 미국 현지 조달 비중을 높이게 되면, 국내 생산은 줄고 협력업체들의 구조조정 가능성은 높아질 수밖에 없다. 이는 지역 경제 위축과 고용 불안, 나아가 저출산 문제와 실업률 상승 등 사회 전반으로 파급될 수 있다.
이와 관련, 최근 미국 생산기지를 추진 중인 한 대기업의 2차 협력사 관계자는 "미국 수출 물량을 현지 생산으로 전환하는 규모 만큼, 국내 생산 물량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면서 "미국 외 지역의 판매량이 획기적으로 늘어나지 않는다면, 부품사들의 납품 물량이 감소하는 것은 사실상 확정적"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런 상황에서 투자나 채용을 늘리는 것은 언감생심"이라며 "오히려 생존을 위해 납품 단가 재조정 등을 고민해 봐야 하는 시점"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전문가들은 산업 공동화에 대비한 정부·기업의 전략적 대응이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조철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대기업과 달리 중소·영세 협력업체는 해외 동반 진출이 쉽지 않아, 대기업이 현지 조달을 늘릴 경우 국내 구조조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며 "과거처럼 중장기적 계획이 아닌 외부 압력에 따른 급박한 진출이 늘어난 지금은 대응이 더 어려운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제3국으로의 수출 다변화와 대기업의 국내 생산 유지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서용구 숙명여대 경영학과 교수는 "현대차가 미국에서 혼다·도요타보다 더 많은 투자를 진행한 것은 글로벌 전략 측면에선 긍정적이지만, 국내 제조 생태계는 점점 무너질 수 있다"며 "이번 현대차 사례를 통해 정부가 외국 기업의 국내 투자 환경을 조성하는 노력도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이어 "지방 산업 현장에선 이미 협력업체 생존 위기가 현실화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강경훈 동국대 경영학과 교수도 "대기업과 1·2·3차 벤더 등 협력업체들이 동반자 관계로서 함께 대책을 모색하고, 해외 현지 진출도 공동으로 협의해 나가는 방식이 바람직하다"며 "정부가 이를 유도하고 지원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업들이 각자도생 방식으로 따로 움직이게 되면, 국내에 남아 있는 협력업체들은 무너지고 기업 생태계 전반도 악화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