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25.09.20 17:08
국내 재계, 美 투자 전략 수정 및 장고 돌입
오히려 인력 유출 방지 가능성도…재계 일각 "글쎄"

[뉴스웍스=안광석 기자]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가 전문직 비자로 불리는 'H-1B' 비자 수수료를 기존 1인당 연간 1000달러에서 10만달러(약 1억4000만원)로 100배 인상한 결정은 오히려 한국에는 고급인력 유치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20일 재계에 따르면 트럼프 행정부의 전문직 비자 수수료 인상은 미국 내 생산을 확대해 미국발(發) 관세 폭탄을 피하려던 기업들의 전략에 큰 영향을 끼칠 전망이다.
H-1B 비자는 과학·기술·공학·수학(STEM) 분야의 전문 직종에 적용되는 비자다. 추첨을 통한 연간 발급 건수는 8만5000건에 불과하다. 해당 비자는 기본 3년 체류하되, 연장 및 영주권 신청이 가능하다. 트럼프 행정부의 이번 조치로 3년간 매년 같은 금액의 수수료를 내고 비자를 갱신해야 한다.
미국에 진출한 기업들이 본국 인력보다는 현지 인력을 채용하도록 압박하는 조치로 풀이된다. 이에 따라 대부분의 국내 대기업들은 급증하는 인건비 등의 리스크를 고려해 정부의 외교 향방을 주시하면서 미국 내 투자 규모나 속도를 재검토할 전망이다.
그러나 현재 H-1B 비자를 활용해 외국 인력을 채용하는 기업의 대부분이 구글·애플·아마존·메타·마이크로소프트 등 미국 내 글로벌 기업이다. 한국 출신의 H-1B 비자 비율은 1%대인 만큼, 국내 기업 타격은 상대적으로 작을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삼성이나 현대자동차 등 국내 대기업들은 대부분 'L-1' 및 'E-2'을 활용한다. 이는 미국 법인과 한국 본사 간 내부 인력 파견을 위한 비이민 비자다. 아울러 단기 프로젝트에 인력을 파견할 시에는 단기 상용 비자인 'B-1'이나, 정식 비자가 아닌 여행 목적으로 2년 동안 미국을 오갈 수 있는 '이스타(ESTA)' 허가증도 활용한다.
오히려 이번 트럼프 행정부의 조치가 인재 유출 방지의 계기로 작용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KISTEP)에 따르면 미국이 최근 10년간(2014~2023년) 발급한 H-1B 비자 중 한국인은 모두 2만168명이다. 매년 미국으로 2000여명의 인재 유출이 발생 중인 셈이다.
현재 인재 유치를 위해 유럽과 중국, 일본 등이 발 빠르게 움직이는 가운데 정부도 뒤늦게 인재 유입 정책을 내놓는다는 계획이다. 정부는 전략기술 분야 위주로 박사후연구원 및 신진연구자, 석학 등을 유치해 국내 정착을 지원하는 국가 프로젝트 '브레인 투 코리아'를 추진하기로 했다. 오는 2030년까지 인공지능(AI) 및 바이오 등에 2000명을 유치하는 게 목표다.
이에 따라 정부는 지난 8월부터 과학·기술 인재 유출 방지 및 유치 대책 마련을 위한 민관합동 태스크포스(TF)를 구성했다. 이르면 이달 말 새 정부 첫 인재 정책을 내놓을 계획이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이 어디로 튈지 예측이 불가능한 만큼 한국에 유리한 처지도 아니다. 트럼프 정부의 이민제한 정책으로 이번 H-1B에 이어 추후 L-1 및 E-2 발급조건도 까다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L-1 비자의 경우, 파견직원이 특수 전문 지식을 갖고 있음을 증명해야 하는데, 단순 기술직이나 보편적인 지식으로는 비자 승인이 어렵다. E-2도 단순한 이윤 추구 목적이 아닌 미국 경제에 실질적으로 기여하는 사업체임을 입증하는 방식으로 강화될 전망이다. B-1이나 ESTA 활용도를 높이면 최근 발생했던 국내 대기업 직원 구금 사태도 재현될 수도 있다.
현재 한미 양국이 진행 중인 비자 제도 개선 논의도 이번 전문직 비자 수수료 인상 정책이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당초 정부는 미국과의 비자 제도 개선 논의에서 H-1B 비자의 한국인 쿼터를 확보하는 동시에 해당 쿼터에 숙련공도 포함하는 방안을 고려했으나, 이제는 전략 변경이 불가피하게 됐다.
추후 다른 비자 문제에서도 미국 우선주의에 따라 자국 이익을 철저히 챙기겠다는 트럼프 행정부 방침이 명확해지면서, 한국에 더 까다로운 요구 조건을 내세울 수도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현재 상황만으로는 추후 미국 투자 계획을 상세히 설계할 수 없는 만큼 정부와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 방향을 면밀히 모니터링 중"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