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김태기 교수
  • 입력 2020.02.08 00:05

김태기의 경제클리닉 “중산층 회복하려면 산업혁신 필수…규제 확 풀고 숙련인력 확보 등 혁신인프라 강화해야”

김태기 단국대 교수
김태기 단국대 교수

“시대를 앞서가지 못하면 시대에 잡아먹힌다.”

슈뢰더 수상의 철학이다. 이는 메르켈 수상으로 이어지는 독일 개혁의 출사표로 볼 수 있다. 좌파인 사회민주당 슈뢰더는 노동과 복지 개혁을 했고, 우파인 기민당 메르켈 수상은 산업혁신으로 이어갔다. 덕분에 10% 넘는 실업률로 유럽의 병자 취급받던 독일은 3%대로 떨어지고 유럽의 슈퍼스타가 되었다.

슈뢰더는 소속 국회의원들을 모아놓고 개혁하지 않으면 당신들은 재선되어서 안 된다고 경고했다. 노동과 복지 개혁이 인기가 없고 노동계가 반대하나, 독일 미래를 위해 반드시 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메르켈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모인 자리에서 4차산업혁명에 적극적으로 나서라고 요구했다. 독일의 제조업은 지금 세계 최강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디지털기술의 활용이 뒤떨어져 위기에 처해있다면서 산업계가 분발하라고 촉구했다. 이러한 전방위 개혁은 독일을 유럽통합의 최대 수혜자로 만들었고 정치적으로도 유럽의 최강자 지위에 올라서도록 만들었다.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민주당을 신진보(New Democrat)로 바꾼다며 등장한 미국 클린턴 대통령의 출사표다. 교육기회와 저임금계층에 대한 지원 확대 등 진보적인 민주당 노선은 유지하되 자유무역과 탈규제, 기업투자 촉진과 재정 건전화를 중시하는 보수적인 공화당의 노선을 수용했다.

클린턴의 개혁으로 디지털기술의 첨단 산업이 대거 등장했고, 제조업의 짐으로 취급받던 서비스산업의 생산성이 급성장했다. 경기는 상승 커브를 이어갔고, 7%대의 실업률은 3%대로, 6%대의 물가상승률은 2%대로 떨어지면서 신경제(New Economy)라는 평가를 받았다. 특정 산업 키우기식 산업정책이 아니라 규제를 획기적으로 없애고(1975-2006년 사이 규제의 74% 폐지) 자유무역을 확대하는 등 산업기반 강화정책을 추구했다. 미국의 신경제로 전환은 독일은 물론 유럽의 개혁을 자극했고 우리나라도 개혁에 눈을 뜨게 만들었다.

기술혁신 및 세계화에 따른 산업혁신은 첨단 기술 신산업의 등장과 성장 산업으로의 구조조정이 골자다. 그 결과 제조업의 고용 비중은 줄고 서비스업은 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와 달리 중소기업과 서비스업의 고용 비중이 급격히 증가했으나 생산성 향상은 제자리걸음이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그리고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불균형 성장은 중산층 감소와 소득 불평등 확대를 일으켰다. 중소기업은 서비스업에 몰렸고, 서비스업은 규제산업이 되면서 영세화되면서 기술혁신과 세계화와 멀어졌다. 대기업의 서비스업 진출을 차단하고 반면, 중소기업은 정부의 보호와 재정지원에 안주하도록 만들었다. 게다가 대기업은 노동조합에 눌려 인건비가 급격히 증가하자 자동화뿐 아니라 해외 진출에 눈을 돌렸다. 결국에는 신산업의 등장과 구조조정이 억제되어 산업혁신이라는 단어가 사라지면서 고학력 일자리는 씨가 말랐고 저임금 일자리만 넘쳐 노동시장 이중구조문제가 악화했다.

우리나라는 기술혁신 및 세계화가 반쪽효과에 그치고 반면 이중구조문제만 커진 이유는 같은 시기에 불었던 민주화 바람의 역풍에 있다. 민주화로 정책 결정과 집행의 메커니즘이 바뀔 수밖에 없으나 경제에 미치는 충격은 부정적이었다. 정부가 전략적으로 유망 신산업을 지정하고 집중지원으로 육성하는 정책이 민주화 이전에는 작동했지만 민주화 이후 정치 불안으로 한계에 봉착해 산업은 혁신보다 현상 유지에 급급했다. 그렇다고 민주주의 시대에 맞는 새로운 성장모델을 만들지도 못했다. 우리나라의 장점인 민관협력과 노사협력은 사라졌고, 정부는 기업에 군림하고 여기다가 노동조합까지 기업을 눌러는 관계로 바뀌었다. 게다가 정부는 장기적인 목표를 세우고 부처끼리 협력해 정책을 공조하며 일관성 있게 정책을 추진하던 장점도 사라졌고 대신, 위험이 따르거나 시간이 걸리는 정책은 회피하는 문제가 커졌다.

그렇지만 역대 정부는 개혁의 간판만은 내걸어 왔다. 다른 나라의 분위기 때문에 개혁의 필요성은 느꼈지만, 개혁이 안팎의 장애물을 극복하지 못했다. 안으로는 민주화에 들떠 시대변화의 본질을 직시하지 못했고, 바깥으로는 기득권의 장벽이 켜졌기 때문이다. 혁신을 일으키는데 필수적인 낡은 제도와 관행을 바꾸지 못함에 따라 성장과 분배가 모두 악화해 국민의 불만은 커졌고 정치권은 그 불만을 경제민주화로 달랬다. 급기야 이런 불만을 이용해 문재인 정권이 들어섰고 개혁은 아예 실종되었다. 적폐청산 타령에다 소득주도성장이나 공정경제 등으로 자유와 창의를 억누르고, 시대를 거꾸로 가는 반(反) 개혁 정책이 극성을 부린다. 4차산업혁명은 말뿐이고 어느 날 갑자기 수소 경제한다고 했다가 데이터경제, AI경제 한다고 나선다. 게다가 인기영합적인 정책이 즉흥적으로 만들어지고 정부의 자의적인 개입이 강화되어 산업혁신은 멀어져간다.

하지만 우리나라가 중국의 추격을 물리치고 중산층을 회복하려면 반드시 산업혁신을 해야 한다. 클린턴의 말을 빌리자면 문제는 취약한 산업기반이고, 슈뢰더의 말처럼 산업혁신 하지 못하면 시대에 잡아먹힌다. 남부 유럽과 남미처럼 실업자가 넘치고 정치마저 양극화된다. 기술혁신과 세계화 및 반세계화에 따른 국제 질서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도록 정부는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산업혁신을 추진해야 한다.

첫째, 정부부터 산업혁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 소득주도성장이나 공정경제 등의 정책도 이에 맞추어 폐기하거나 수정해야 한다. 유명무실해진 대통령 직속의 4차산업혁명위원회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전면 개편해야 한다. 독일의 4차산업혁명 정책은 메르켈 수상이 직접 나섰고, 우리나라로 보면 기획재정부와 교육부가 공동으로 추진했다는 점에 유념해야 한다. 교육 혁신 없이 산업혁신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산업혁신의 주된 목표를 중소기업과 서비스업에 두고 이에 맞도록 정책을 새로 짜야 한다. 중소기업은 보호의 대상이고 서비스업은 공공재라는 낡은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 대기업 및 제조업과 비교해 유연성과 신속성이 중소기업과 서비스업의 장점이고, 매우 다양하다는 점을 고려해 규제를 전면적으로 풀고, 규제를 유지하더라도 이러한 특수성을 반영해 혁신의 분위기를 키워주어야 한다. 직업교육·훈련개혁을 통해 디지털기술 활용능력을 갖춘 숙련 인력의 공급을 대폭 확대해야 한다.

셋째, 특정 산업 육성이나 개별 기업 지원 방식이 아니라 혁신 인프라를 강화하는 산업정책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 효과가 없는 정책부터 폐기하고 남아있는 모든 정책의 공조와 일관성을 강화해야 한다. 어떤 정책이라도 사무실에 있는 공무원의 편의가 아니라 현장에 있는 정책 수요자의 요구를 우선해야 한다. 기술혁신정책은 정부출연 연구기관 중심에서 산학연 협력 중심으로 전환하고, 중소기업지원정책은 자금 중심에서 숙련 인력 확보 및 양성 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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