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차진형 기자
  • 입력 2024.05.16 15:10

57년 동안 금융환경 변화 때마다 도전…성공 DNA 축적
경영혁신 모범 사례…지방은행 새로운 활로 모색 선도해

1967년 10월 7일 대구은행 개업식이 대구시 중구 동문동 38번지 대구상공회의소 내 임대건물에서 개최됐다. (사진=대구은행 50년사)
1967년 10월 7일 대구은행 개업식이 대구시 중구 동문동 38번지 대구상공회의소 내 임대건물에서 개최됐다. (사진=대구은행 50년사)

[뉴스웍스=차진형 기자] '조상제한서(조흥·상업·제일·한일·서울)'는 20세기 대한민국 금융계를 이끌었던 서울 지역 기반의 5대 시중은행을 말한다. 지금은 외환위기 여파로 은행 간 합병이 이뤄져 명맥이 끊겼다. 

반면 지방은행은 '대부광전경(대구·부산·광주·전북·경남)' 5대 은행이 남아 있다. 일부 은행은 경쟁은행에 인수됐지만 이름만큼은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이제 '대부광전경'에서 대구은행 이름이 빠진다.

16일 대구은행은 금융위원회로부터 시중은행 전환을 공식 인정받아 전국구 은행으로 재탄생한다.

◆최초 타이틀 익숙한 대구은행(1967~1980년)

지방은행이 시중은행으로 재탄생하는 건 최초다. 지방은행은 1967년 당시 정부가 추진한 '1도1행' 정책으로 인해 설립됐다. 1962년부터 경제개발이 본격화된 후 5년 동안 제조산업은 태동했지만, 경제 대국으로 발전하기 위해선 지역 경제도 함께 성장할 필요가 있었다.

대통령 지시에 금융당국은 지방은행 설립 지침을 지방 상공회의소에 전달하고 대구은행이 1967년 10월 7일, 첫 깃발을 들었다.

최초 지방은행 출범 소식이 전해지자, 박정희 대통령은 직접 축하 메시지와 함께 정기예금에 가입하며 대구은행의 1호 고객이 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대구은행 출범을 축하하며 예금 1호 고객이 됐다. 사진은 1호 고객으로 예금한 전표. (사진=대구은행 50년사)
박정희 대통령은 대구은행 출범을 축하하며 예금 1호 고객이 됐다. 사진은 1호 고객으로 예금한 전표. (사진=대구은행 50년사)

대구은행이 처음 둥지를 튼 곳은 대구시 중구 동문동의 대구상공회의소 내 임차건물이었다. 시작은 단칸 셋방이었지만, 출범 3년 만에 남일동 본점 시대를 열었다. 이후 남일동 본점은 15년 동안 대구은행의 성장을 이끌었던 터전으로 사랑받았다. 현재는 대구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에 위치한 중앙로지점으로서, 환전센터로도 운영 중이다.

남일동 본점 신축에 이어 1972년 대구지역 기업체로는 최초로 주식상장에 성공했다. 그러나 1년 뒤인, 1973년 1차 석유파동으로 위기가 찾아왔다.

대구은행은 당시 위기를 무상증자로 극복했다. 최초로 실시된 무상증자는 소수 대주주에 의한 자본지배에서 벗어나 자본과 경영의 분리원칙을 확립하고, 지방은행 중 가장 먼저 주식의 대중화를 실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위기를 극복한 대구은행은 출범 10년 만에 지역 중심은행으로 부상했다. 설립자본 1억5000만원을 모으기도 버거웠던 시절을 지나 자본금이 60억원으로 늘었다.

무엇보다 대구지역 내 예금점유율은 49.3%, 지역기업 자금공급 기여율은 51.3%로 확대되며 현재까지 지역 경제를 지탱하는 금융기관으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1982년 대구은행은 창구의 금융거래 편의성과 창구 업무 절감을 목적으로 현금자동지급기 5대를 도입했다. 또 '캐시카드'에 의한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대구은행 최초의 자동화 코너를 개설했다. (사진=대구은행 50년사)
1982년 대구은행은 창구의 금융거래 편의성과 창구 업무 절감을 목적으로 현금자동지급기 5대를 도입했다. 또 '캐시카드'에 의한 금융서비스를 제공하는 대구은행 최초의 자동화 코너를 개설했다. (사진=대구은행 50년사)

◆위기 때마다 발휘되는 역발상 DNA(1980년~2000년)

1980년대 대구은행은 위기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이때마다 역발상 전략으로 위기를 극복해 왔다.

1980년대 말 서울에 기반을 둔 시중은행의 지방 진출이 활발히 진행됐을 때 대구은행은 글로벌은행과 전국은행이라는 경영전략을 구사했다.

1989년 12월 지방은행으로서는 최초로 동경사무소를 개설했다. 이후 동경사무소는 해외 거점 확보 방안을 검토하고 해외 선진금융기업에 관한 정보를 수집했다. 일본에 진출한 지역 중소기업에도 각종 금융 편의를 제공했다.

전국은행 전략으로는 부산·경남지역에 과감하게 진출했다. 1990년 울산지점을 시작으로 부산 범일동지점, 경남 마산지점을 열었다. 1991년에는 서울 강남지역인 역삼동 지점을 개설하며 서울 지역 3곳, 부산·경남 3곳 등 권역 밖을 공략했다.

1990년대는 금융환경이 자율·개방화의 진전에 따라 빠르게 변화했다. 금리자유화가 단계별로 진행됐고 금융실명제가 단행됐다. 대구은행도 이에 대응하기 위해 경영혁신위원회를 구성하고 전담조직인 경영혁신사무국을 설치했다.

경영혁신의 원활한 추진을 위해 삼성경제연구소를 협력 파트너로 선정, 1993년부터 1995년까지 3년간 의식개혁과 경영체질 강화, 경영프로세스 혁신, 중장기 경영전략 수립 등 경영컨설팅 계약을 체결했다.

이에 경영혁신 1차 연도인 1993년에는 경영혁신의 주안점을 직원들의 의식개혁에 뒀다. 고객만족헌장과 고객만족경영 실천 5대 행동 지침을 제정하고 고객만족운동을 전행적으로 확산했다. 그 과정에서 혁신대화의 날 제정에 이어 파랑새 전화서비스센터를 개설했으며 CS연구회 등과 같은 자발적인 조직이 생겨났다.

1993년 대구은행은 임직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TOP 93 경영혁신 발진대회'를 갖고 본격적인 혁신운동을 진행했다. 경영혁신의 목표와 비전을 '21세기 초일류은행'의 실현으로 설정했다. (사진=대구은행 50년사)
1993년 대구은행은 임직원들이 참석한 가운데 'TOP 93 경영혁신 발진대회'를 갖고 본격적인 혁신운동을 진행했다. 경영혁신의 목표와 비전을 '21세기 초일류은행'의 실현으로 설정했다. (사진=대구은행 50년사)

경영혁신 2년 차인 1994년에는 조직, 인사제도, 경영프로세스 혁신에 역점을 뒀다. 세무·법률·건강·부동산 관련 전문가를 초빙, 지역 주민들의 각종 상담에 무료로 응대하는 ‘파랑새종합상담실’을 고객만족센터 내에 설치, 운영했다. 또한 한국금융연구원과 재무전략 컨설팅 계약을 체결하고, 금리·주가·환율 등 가격변수에 따른 리스크 방지와 경영효율의 극대화를 위해 ALM(Asset Liability Management)시스템을 구축했다. 

3차 연도인 1995년에는 신경영이념과 비전을 바탕으로 향후 10년간의 장기 전략인 '2005 전략경영'을 수립했다. 2005 경영전략에는 사업구조의 재구축과 인재 육성, 경영시스템의 혁신을 통해 2005년 세계 100대 은행에 진입하는 계획을 담아냈다. 그뿐만 아니라 대형화·겸업화 추세에 대응, 은행 부문의 시장 위치 전략을 리테일뱅킹 중심의 전국은행 실현에 두었다. 종합금융그룹 도약이라는 높은 이상도 함께 담아냈다.

대구은행의 경영혁신 추진과 우수한 경영성과는 지역사회와 국내 금융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추진 사례를 벤치마킹하기 위한 지역 금융기관과 기업들의 방문이 줄을 이었다.

IMF 외환위기 때는 최대의 시련기를 맞이했다. 주요 거래기업들이 줄도산하고 지역 경제도 흔들렸다. 생존을 위해선 외국자본 유치가 대안으로 부상했다. 당시 미국계 자산운용사가 대구은행 인수를 결정하고 감자를 조건으로 자본 참여를 제안해 왔다.

외국계 자본은 은행장 임기보장, 스톡옵션 등으로 유혹했지만 대구은행은 고심 끝에 독자생존을 선택했다. 이유는 외국자본 유치를 위해 감자를 단행하면 지역을 기반으로 삼고 있는 영업 기반이 붕괴할 우려가 있었다.

독자생존을 결정하자 지역사회는 화답했다. 지역민은 예금 인출을 자제하는 등 대구은행의 정상화를 염원했다.

이후 대구은행의 경영실적은 가파르게 상승했다. 경영실적에 힘입어 대구은행은 IR 활동을 통해 주가 회복에 나섰다. 그 결과 미래 전망을 긍정적으로 보는 외국인의 매수세도 폭증했다. 2001년말 3.7%에 불과하던 외국인 지분율이 2002년 20%대에 이어 2004년에는 50%를 넘어섰다.

2004년 대구은행은 동아일보사와 한국IBM BCS가 공동 발표한 '존경받는 30대 한국기업'에서 종합 순위 6위를 차지했다. 당시 대구은행은 100점 만점에 78.77점을 획득해 대우증권(11위), 국민은행(16위) 등 대형 금융회사를 제치고 금융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 (사진=대구은행 50년사)
2004년 대구은행은 동아일보사와 한국IBM BCS가 공동 발표한 '존경받는 30대 한국기업'에서 종합 순위 6위를 차지했다. 당시 대구은행은 100점 만점에 78.77점을 획득해 대우증권(11위), 국민은행(16위) 등 대형 금융회사를 제치고 금융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 (사진=대구은행 50년사)

◆종합금융그룹으로 비상…지역 한계 뛰어넘는다(2000년~현재)

정부는 2000년 10월 금융지주회사법을 제정하고 국내 금융회사의 덩치 키우기에 나섰다. 이때부터 은행들은 비은행 계열사를 인수하며 몸집을 불려 나갔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하자 저성장 시대가 고착되면서 위기 대응과 미래 대응을 동시에 강화하기 위한 근본적인 해법 마련이 시급해졌다.

이에 대구은행도 2010년 금융지주회사 전환을 결심했다. 2011년 5월 출범한 DGB금융지주는 대구은행, 대구신용정보, 카드넷 등 3개 자회사를 갖추고 출발했다.

사업 확장을 위해 지역 중소기업과 서민금융 지원 확대를 위해 캐피탈 사업에 진출했다. 2011년 12월 메트로아시아캐피탈의 지분 100%를 인수, 이듬해 자회사로 편입해 DGB캐피탈로 상호를 변경했다.

DGB캐피탈은 은행 영업을 보조하며 리스 및 소비자금융 부문에서 첨병 역할을 했다. 수도권과 부산·울산·창원 등 동남권 지역으로의 영업망 확대를 통해 기존 대구은행의 지역적 한계를 극복하며 전국 영업기반을 구축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2012년 정보기술 자회사인 DGB데이터시스템을 설립했다. 금융지주 및 계열사의 전산시스템을 단계적으로 통합, 운영하는 한편 전산업무를 표준화해 그룹 시너지 기반을 구축했다.

2014년 DGB금융은 보험·자산운용·증권 등 전국 영업망을 보유한 자회사 확충을 천명했다. 인수합병을 통해 2020년까지 총자산 100조원, 순이익 6000억원 규모의 종합금융그룹으로 도약한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이어 2014년 우리아비바생명, 2016년 LS자산운용. 2018년 하이투자증권을 인수하며 종합금융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는 필수 사업라인을 확보했다.

2016년 대구은행은 사무공간 부족 해소와 금융그룹 위상 강화를 위해 제2본점을 완공했다. 제2본점은 금융지주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며 그룹의 성장을 이끌고 있다. (사진=대구은행 50년사)
2016년 대구은행은 사무공간 부족 해소와 금융그룹 위상 강화를 위해 제2본점을 완공했다. 제2본점은 금융지주 컨트롤타워 역할을 하며 그룹의 성장을 이끌고 있다. (사진=대구은행 50년사)

이제 DGB금융은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지역은행인 대구은행이 시중은행으로 전환해 전국구로 새역사를 쓴다.

대구은행은 1992년 평화은행 이후 32년 만에 등장하는 시중은행으로, 지방은행의 시중은행 전환 첫 사례다.

지역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이름도 바꾼다. 대구은행은 iM뱅크로 사명 변경을 추진하고 대구지역에선 지역명을 유지한다.

대구은행이 iM뱅크로 사명을 정한 배경은 디지털 경쟁력을 높이겠단 전략이 내재돼 있다. 현재 영업력만으론 시중은행과 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할 수 없는 만큼 비대면 시장에서 경쟁력을 찾겠단 것이다.

이와 함께 시중은행으로 전환되면 금리 경쟁력도 확보할 것으로 기대된다. 대구은행이 발행하는 선순위채권 금리는 시중은행과 비교해 0.04% 포인트 높은 수준이다. 조달금리가 높은 탓에 대출금리 경쟁력에서 밀렸는데, 시중은행 전환으로 신용등급이 상향 조정될 경우 더 낮은 금리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다른 지역으로의 진출도 활발히 진행될 것으로 보인다. 현재 대구은행의 지점은 199개로, 대구 및 경상도를 제외한 지점은 10개 미만이다. 특히 충청도, 강원도, 전라도, 제주도 등에는 지점이 전혀 없는 상태다. 시중은행으로 전환되면 이들 지역 진출도 가능하다.

대구은행의 시중은행 전환은 과거 역사를 되짚어 보면 선택이 아닌 필수다. 최근에는 인터넷전문은행인 카카오뱅크와 순이익 격차가 83억원에 불과하다. 이미 이자이익 규모에선 대구은행을 압도하고 있다.

대구은행 관계자는 "인터넷전문은행의 추격을 뿌리치기 위해선 시중은행급 경쟁력을 확보하는 수밖에 없다"며 "그동안 위기를 극복해 온 성공 DNA를 가진 만큼 앞으로도 또 하나의 성공사례를 만들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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