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정희진 기자
  • 입력 2025.08.27 11:49

[뉴스웍스=정희진 기자] 약속에 늦은 날, 닫히는 열차 문 앞에서 주저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막상 열차가 떠난 뒤에는 언제나 '올라탔어야 했다'는 후회만 남는다.

지금 금융업계가 마주한 '원화 스테이블코인' 논의가 딱 그렇다. 시장은 이미 속도를 높였고, 그 흐름은 가속화되고 있다.

미국은 이미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앞세워 달러 패권을 디지털로 확장 중이다. 국제 결제와 투자 네트워크를 달러로 고정시키며, 막대한 재정적자와 부채 부담을 분산시키겠다는 전략이다. 전통 금융의 기축통화가 달러였다면, 디지털 경제의 '기축 스테이블코인'도 달러로 만들겠다는 계산이다.

중국의 행보도 매섭다. 디지털 위안화를 넘어 홍콩을 거점으로 한 위안화 스테이블코인 허용 논의가 본격화됐다. 24시간 국경 없는 거래망을 기반으로 아시아 금융권의 결제 흐름을 위안화 중심으로 재편하려는 포석이다.

반면 한국은 여전히 중앙은행의 결정을 기다리며 머뭇거리고 있다. 법과 제도가 시장 흐름을 따라잡지 못한다는 지적이 계속되는 이유다.

국회에서 논의 중인 디지털자산기본법은 변화를 시작할 출발점이다. 인가제를 통한 발행 안정성, 규제 샌드박스를 통한 실증, 디지털자산위원회를 통한 정책 일관성 확보가 병행된다면 속도와 안전을 동시에 잡을 수 있다. 

업계도 이미 제도 시행을 대비해 인프라를 갖춘 상황이다. 오직 중앙은행과 금융당국만이 여전히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유동성 확대·자금세탁·외환 불안'이라는 좁은 프레임으로만 바라보고 있다.

하지만 국내 금융시장의 자본력과 IT 인프라, 그리고 축적된 규제 경험을 감안하면 이 도전은 충분히 실현 가능하다. 중앙은행이 CBDC 실험을 통해 쌓아온 데이터와 기술은 평시와 위기 상황을 아우르는 관리 체계 구축의 핵심 토대다.

강형구 한양대 교수가 제안한 'K-스테이블코인 런치패드(Launchpad)' 모델도 이 점을 뒷받침한다. 평시에는 실시간 모니터링과 블랙리스트 관리로 안전성을 유지하고, 위기 시에는 송금 한도 조정, 지급준비금 비율 상향, 해외 전송 필터링으로 리스크를 통제하는 방식이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더 이상 금융 실험의 대상이 아니다. 글로벌 시장에서 원화의 입지를 넓힐 사실상 유일한 카드이자, 아시아 금융 허브 경쟁에서 한국의 존재감을 입증할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정책이 이 흐름을 따라잡지 못한다면, 돌아오는 것은 뒤늦은 후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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