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력 2025.06.29 18:00

[뉴스웍스=김상우 기자] 국제 밀(원맥) 시세가 가파르게 떨어지고 있다. 국제 밀값 상승의 원흉이었던 '러우전쟁' 이전보다 더 낮은 시세를 형성하며 10년 전 수준으로 돌아가는 중이다. 이에 따라 밀가루 가격 상승을 주된 이유로 그동안 제품 가격을 올려왔던 라면·과자·빵 등의 제조업체들은 원자재 수입에서 상당 부분의 차익을 실현할 전망이다.
29일 글로벌 금융시장 정보제공사이트인 트레이딩 이코노믹에 따르면, 밀 선물가격은 26일 기준으로 부셸(27.2㎏)당 5.2달러를 기록했다. 이는 지난 2018년 6월에 기록한 5.2달러와 동일한 가격대로, 2022년 2월 24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전보다 낮은 수치다.
밀 시세는 2015년부터 2020년까지 부셸당 4~6달러 수준을 형성했지만, 러우전쟁 이후 밀 공급망 붕괴 우려에 최대 11.7달러까지 치솟았다. 이번 밀 가격 폭락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를 제외하더라도 미국과 캐나다, 호주, 프랑스 등 주요 밀 수출국들이 밀 풍년을 맞으면서 생산량이 급증했기 때문이다.
특히 미국 트럼프 행정부가 세계 각국을 대상으로 엄포를 놓는 관세 폭격도 영향을 끼치고 있다. 관세에 따른 수출 부담에 밀 수출과 수요 부진이 두드러지고 있는 것이다. 만약 연내 러우전쟁이 휴전으로 끝난다면 우크라이나가 밀 수출에 적극 나서면서 국제 시세가 더 떨어질 가능성이 커진다.

이러한 밀가루 시세 폭락에 국내 관련 업체들은 표정관리에 들어갔다. 대한제분과 같이 밀 원물을 수입해 밀가루를 만들어 파는 제분업체들은 물론, 라면·과자·빵 등의 주요 제조업체마다 밀값 하락이 반갑기 그지없다.
대한제분은 러우전쟁이 치열했던 2022년 원맥 수입가격이 톤(t)당 52만8868원을 형성하다가 지난해 43만4441원으로 17.8% 크게 떨어졌다. 대한제분은 지난해 국제 밀 시세의 전반적 하락 추이에도 불구하고 밀가루 가격을 톤당 3.8% 인상했다.
국내 1위 제과업체 오리온도 같은 기간 ㎏당 소맥 구입단가(해외 기준·국내 누락)가 820원까지 오르다 지난해 734원으로 낮아졌다. 올해는 600원대 진입이 거뜬할 것으로 보인다.
국내 라면업계 1위 농심도 비슷하다. 같은 기간 농심의 소맥 수입가는 톤당 332달러에서 210달러로 낮아졌다. 올해는 국제 밀 시세를 고려할 때 100달러대 진입이 무난할 전망이다. 농심은 올해 3월 라면과 스낵 17개 제품에 출고가를 평균 7.2% 인상했다.
식품업계 황제주 반열에 오른 삼양식품도 비슷한 상황이다. 계열사인 삼양제분의 SW(Soft White) ㎏당 가격은 같은 기간 645원에서 405원으로 대폭 낮아져 시세 차익을 누리는 중이다.

일각에서는 이재명 대통령이 '라면값 2000원'을 언급할 정도로 서민물가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어 식품업계가 가격 문제에 선제적으로 대응할 필요가 있다는 진단이다.
지난해 9월 해태제과는 국제 밀 가격 안정을 이유로 '계란과자', '칼로리바란스', '사루비아' 등 밀가루 비중이 높은 비스킷 3종의 가격을 평균 6.7% 인하했다. 당시 정부의 물가안정 정책에 동참하기 위한 선제적 조치로 평가받는다.
업계 한 관계자는 "인건비와 전기세 등 각종 제반비용 부담이 여전하다고 해도 그동안 대다수 식품 제조사가 원자재 가격 급등을 이유로 제품 가격을 올려왔다"면서 "지난해 말 1500원대에 육박하던 환율도 최근 1300원대의 안정적 흐름을 유지하고 있어 국제 원자재 시세 하락은 올해 제조사들의 영업이익률 제고에 큰 힘이 될 것"이라고 진단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최근 공정거래위원회가 가격 담합 의혹 등을 제기하며 주요 식품업체들의 현장 조사를 단행한 것과 연계한다면, 현 정부는 민생물가 안정에 강력한 의지가 있음을 직간접적으로 전달하고 있다"며 "새정부 초기라는 특수성을 고려할 때 잘 안 팔리는 일부 제품에 한해서라도 가격 인하 조치를 내리는 후속 행동이 나올 수 있다"고 예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