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정희진 기자
  • 입력 2025.06.23 14:16

PB센터, 설명서보다 '사람' 앞세운 구조 드러나

벨기에 코어오피스 부동산신탁 투자자들이 손실과 관련해 판매사에 책임을 제기하며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정희진 기자)
벨기에 코어오피스 부동산신탁 투자자들이 손실과 관련해 판매사에 책임을 제기하며 시위를 하고 있다. (사진=정희진 기자)

[뉴스웍스=정희진 기자] 투자 판단의 근거가 '사람'이 됐다. PB센터라는 폐쇄적 공간, 고객 맞춤형 권유 방식, 구조적 위험을 축소한 설명, 이 모든 요소가 결합되면서 신뢰 기반의 판매는 감정적 동의로 이어졌고, 그 결과는 대규모 손실로 돌아왔다.

23일 금융권에 따르면 한국투자벨기에코어오피스부동산투자신탁2호(파생형) 피해자 다수는 수년간 거래해온 프라이빗뱅커(PB)의 권유로 해당 상품에 가입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은 상품의 구조나 위험보다 거래 관계에서 형성된 신뢰를 우선시했고, 그로 인해 고위험 파생형 투자에 노출됐다.

피해자 A씨는 지난 19일 서울 여의도 한국투자증권 본사 앞 시위 현장에서 자유발언을 통해 "월급 이체부터 펀드, 보험까지 모두 한 은행에서 했고, PB가 준비해온 수익률 비교표를 직접 받아 적을 정도로 전적으로 믿었다"고 밝혔다. 그는 2019년 국민은행 PB의 권유로 해당 펀드에 1억원을 투자했으며, 후순위 변제 구조나 조기 계약 종료 가능성 등은 전혀 설명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피해자 B씨도 지난 12일 우리은행 피해자 시위 현장에서 기자에게 "가입 당시 설명서를 본 적이 없었고, 위험 안내는 수익자총회에서야 처음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국방부 정보기관이 장기 임차한 건물이라 안전하다는 말만 반복했고, 실제로는 영국 로이스·AXA 보험사가 선·중순위로 배치돼 있었지만 나는 후순위 투자자라는 걸 몰랐다"고 말했다. 설명서보다 평소 신뢰했던 PB의 말이 더 익숙하고 설득력 있게 느껴졌다는 설명이다.

피해자 C씨는 민사소송 지원 커뮤니티에 남긴 글에서 "CMA에 1억 넘게 있으니 7000만원만 넣으라는 전화를 받았고, 선착순 마감이라는 말에 서둘러 가입했다"며 "자산가들은 다 들어갔다는 말에 가입을 미룰 수 없었다"고 밝혔다. 그는 고금리 저축성 상품으로 오해한 채 구조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계약을 체결했고, 가입서류는 가입 2주 후에야 우편으로 수령했으며, 자필 서명란은 PB가 대신 기재했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권유는 대부분 PB센터에서 이뤄졌다. PB센터는 일정 자산 이상 고객을 전담하는 전용 채널로, 일반 지점보다 폐쇄적이고 고급화된 이미지로 운영된다. 특히 이번 펀드의 경우 장기 거래를 통해 고객의 자산 규모, 투자 성향, CMA 잔고 등 구체적 정보를 파악한 뒤, 이 정보를 기반으로 한 맞춤형 권유가 이뤄졌다는 공통점이 있다.

피해자 다수는 "PB가 CMA 잔액을 언급하며 특정 금액만 옮기라고 권유했다", "기존 펀드를 정리해 해당 상품에 재투자하라고 했다"고 증언했다. 고객 입장에서는 자신의 재무 상태를 잘 아는 PB의 제안이 합리적이고 안전한 투자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사례들을 종합하면, 해당 상품의 판매는 단순한 안내를 넘어선 구조적 권유였다. PB는 고객의 경제적 상황과 투자 성향을 바탕으로 접근했고, 고객은 투자 판단의 기준을 상품 설명서보다 평소 쌓아온 관계에 두었다. 고객은 위험 구조를 정확히 인지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후순위 리스크를 떠안는 결과에 이르렀다. 신뢰는 상품 설명을 대체했고, 책임은 오롯이 고객에게 전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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