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명 최승욱 기자
  • 입력 2019.08.26 05:00
(사진=박인기)

8월 12일 오전 7시20분 알베르게를 떠났다. 고원지대 티네오는 아침 기온이 차다. 이제 산티아고까지는 257㎞, 한 열흘쯤 남있다. 즐거운 인생...

(사진=박인기)

6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국인 부부, 그들도 프랑스 바욘을 거쳐 이룬에서 걸어왔단다. 이것 저것 알아봤지만 그 중 제일 좋은 Buen Camino앱에 의지해 매일 잘 걷고 있다며 그 편리성을 보여준다. 그런데 그들은 젊은이들과 잘 어울리지도 않는 것 같고 술도 안먹는단다. 반면 정보엔 매우 민감하다. 날씨, 지형, 알베르게, 호스텔 등의 다음 목적지 정보를 구석에 앉아 제일 먼저 상세하게 숙지하는 것 같다.

(사진=박인기)

또한 매우 부지런하다. 제일 먼저 도착해 제일 편한 입구에 자리를 잡고 또 제일 먼저 숙소를 떠난다. 아침 6시 일어나 보니 벌써 그들 부부의 침대가 싹 정리되어 있다. 서양 청년들의 젊은 발걸음에 뒤쳐지지 않겠다는 새벽의 삶이 그저 경이로울 뿐이다. 내 삶의 방식과 너무 다른 그들은 역시 한국인, 참 지혜롭다.

(사진=박인기)

반면 나는 오늘도 33번,  출입문 옆에 붙여놓은 집 번지 숫자 3, 3을 보았다. 오늘의 생명력도 왕성하다. 3의 숫자는 안정의 의미이지만 축복과 행복, 그리고 행운의 숫자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1+1, 음양 둘이 모여 또 하나, 한 생명을 탄생시켰다. 그보다 더 기쁘고 즐거운 일이 세상에 또 어디 있겠는가?

배낭을 멘 필자. (사진=박인기)

나는 삼월 삼짓날 태어나  6.25 전란을 견뎌냈고 지금까지 별 탈없이 잘 살아왔다. 또 지금 여기 스페인 까미노 길을 즐겁게 걷고 있지 않는가? 3월 3일 태어난 나는 분명 행운아다. 앞으로 또 30년을 행운아로서 살아 갈 것이다. 

지혜는 지식에서 나오고 명덕은 깨달음에서 온다. 지혜는 경계하고 명덕은 포용한다. 힘있는 자, 세상을 만들고 강한 자, 세계를 꿈꾼다. 지인자지 자지자명(知人者智 自知者明).

(사진=박인기)

3은 탈속의 숫자다. 지혜와 명덕을 뛰어 넘는 득도의 숫자다. 득도, 우리는 바깥세상을 살피며 새로운 세계를 얻고자 득도를 꿈꾼다. 그러나 득도는 바깥세상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다. 바깥세상은 이미 변함없이 변하는 도의 세계다. 도는 변함없이 변하는 불변의 진리라 했다.

(사진=박인기)

산이 흘러내려 모래가 되고  바다는 피어올라 이슬이 된다. 산도, 바다도, 길 위의 돌과 풀, 걷고 있는 나와 같이 하나의 도다. 들리고 보이는 것만 보고, 알고 이해하고자 하는 격물치지의 깨달음이 아니다. 보려해도 보이지 않는 것, 그 변함없이 변하는 자기자신을 아는 것, 그것이 득도의 깨달음이다. 지혜의 세상, 명덕의 세계를 뛰어넘어 그 안의 작용,  불변의 자유를 보는 것, 그것이 변함없이 변하는 자기를 아는 진정한 깨달음이다. 

(사진=박인기)

마침 앞에 아침햇살에 비친 멀리 산골마을, 싱그러운 지상의 천국을 바라보며 한 청년이 담배를 피고 서 있다. 이 아침 그림처럼 펼쳐져 있는 변함없는 환상적 도의 세계를 보고 있으리라 짐작했다. 순간 나는 새롭게 펼쳐진 산골마을의 무릉도원, 지상천국에 감탄하는그의 빈 마음 속에 담겨 있을 도의 세계를 보았다. 토리노의 말을 닮은 그는 정말 이태리 토리노에서 온 마르코스였다.

(사진=박인기)

너와 내가 만나 보이지 않는 새로운 세계, 오래된 미래를 만들어 내는 것, 어쩌면 그것이 3의 숫자가 주는 득도, 울림의 상징성 아닐까? 자연 산길과 빈 마음의 떨림, 떨림이 전해주는 울림의 상징성, 3은 그런 울림이다. 그 3을 세 번 펼치면 삶의 유토피아 구승지(九勝地), 내가 사는 현실이 울림으로 넘쳐나는 지상천국이 된다. 열 번째 승지는 아마 천상의 천국, 하늘나라가 되겠지...

순례객들과 다시 만난 필자.(사진=박인기)

3일전 오베이도에서 프리미티보 두 번째 길을 시작할 때 만났던, 갈리시아에서 휴가차 왔다던 세 사람을 이곳 캄피애이요 바(Campieillo Bar)에서 다시 만났다. 마치 오랜 만에 만난 반가운 가족 상봉이다. 그들 중 한 부부의 아들이 멜번에 살고 있다면서 한 달 동안 멜번 여행도 했었다고 감히(?)내게 자랑한다. ㅎㅎㅎ 그리고 도움 주려 한다.

(사진=박인기)

앞으로 갈리시아 지방에 오면 꼭 화이트 와인을 마시라고 스페인어 주문방법까지 알려줬다. Ribeiro Alvarino or Godello (모두 Terras Gauda 브랜드) is No. 1 White  wine, 그리고 Mencia=Red Wine. 그들은 내가 주문한 시드라 한 병까지 계산했다. 즐거운 시간 선물하고 사진 함께 찍고 떠난 그들 세 사람은 어쩌면 오늘 아침 33이 예정한 오늘의 귀인, 오늘의 도인들이었던 것 같다. 도인들 이름은 이사벨(Isaber), 베고냐(Begoña), 라파엘(Rafael)...까미노 길의 어메이징!

(사진=박인기)

세상 만물은 언제 어디서나 떨고 있다. 그 변함없는 떨림이 생명력이다. 떨림은 떨고 있어야 전이된다. 고정화된 성지(成知)를 비워내고 떨고 있는 자, 떨림이 떨림과 교감될 때 그 떨림은 울림이 된다. 떨고 있어야 울릴 수 있다.

(사진=박인기)

장자(莊子)의 바다는 북명(北冥)과 남명(南冥)으로 나뉜다. 바다는 곤(騉)이 붕(䳟)으로 비상하는 곳이다. 음이 양과 만나 회오리 바람일 듯 하늘로 솟구쳐 오르는 곳이 장자가 노래한 바다다. 물이 수증기로 기화하여 상승하는 곳이 바다다. 그렇게 오른 등판의 하늘에서 붕이 된 곤은 6개월 날아가 남쪽바다 남명에서 6개월 노닐다 다시 북쪽바다 북명으로 내려온다. 북면은 속세다. 득도 후  다시 속세로 내려와 울림을 주는 친절한 생활을 이어가는 것, 그것이 장자가 얘기하는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 화광동진(和光同麈)하는 무애(無碍)의 삶이다. 수증기는 다시 비로 내려와 천지에 생명력을 불어 넣는다. 물은 천지만물에 생명력으로 울림을 준다.

◇오늘의 산티아고 순례길=Tineo, Albergue de Mater Christi de Tineo→Campiello→Albergue de Peregrinos Pola de Allande 31㎞, 46,885걸음, 11시간 20분 (까미노 참고용 : Tineo, Albergue de Mater Christi de Tineo→Pola de Allande 25.3㎞, 7시간00분)

*편집자 주=박인기는 강원대학교 멀티디자인학과에서 디자인을 가르치다가 정년 퇴임한 교수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대우그룹 제작부, 애드케이 종합광고대행사 등에서 직장생활을 한뒤 대학 강단에 섰다. 강원대 철학과에서 동양철학 박사학위과정도 수료했다. 대학 시절부터 산악부 활동에 심취했던 그는 올해 70살이 되자 비로소 세상으로부터 한결 자유로워졌다고 한다. 그동안 꾸준히 산악부 OB들과 종종 산을 찾아 마음을 비우곤 하던 그는 지난 겨울엔 여름 호주 ‘The Prom’에서 4박 5일 백패킹을 했다. 이번엔 60일 동안 숙박을 겸한 산티아고 백패킹에 도전한다. 내년 겨울엔 호주에서 6박 7일간 ‘Overland Track’에서 백패킹하기로 이미 예약까지 마쳤다. 즐겁게 80살까지 세상 트레킹하는 것이 '걷는 삶', '꿈꾸는 삶'의 소망이라는 소신을 갖고 있다.  "꿈꿀 수 있고 살 수 있으면 그게 모두 산이 아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그는 7월 6일 13시20분 대한항공 여객기로 인천공항에서 프랑스 파리로 출발했다. 뉴스웍스 독자들도 그와 여정을 함께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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